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통일 신라와 발해진골 귀족의 호화로운 생활상

흥덕왕의 사치 금령 조치

흥덕왕(興德王)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834)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사람은 상하가 있고, (그에 따라) 호칭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경박해지고 백성이 사치와 호화를 다투게 되어 오직 외래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비루함을 혐오하니, 예절이 거의 무시되는 지경에 빠지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에 감히 옛 법에 따라 밝은 명령을 펴는 바이니, 혹시 고의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진실로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권33, 「잡지」2, 색복

興德王即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尚異物之珍竒,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三國史記』卷33, 「雜志」2, 色服

이 사료는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이 834년(흥덕왕 9년)에 내린 교서의 앞부분으로, 교서를 내리게 된 배경과 목적 등을 밝히고 있다. 이 사료는 뒤에 이어지는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등에 대한 세부적인 규정과 함께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해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삼국 통일 후 신라 사회는 사치 풍조가 점점 심해져 갔다. 특히 신라 하대에 이르러 번성한 국제 무역을 통하여 서역을 비롯한 외국에서 사치품이 들어오면서 지배층의 사치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 교서에 “풍속이 점점 경박해지고 백성이 사치와 호화를 다투게 되어 오직 외래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토산품의 비루함을 혐오하니”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실제로 이 교서의 뒷부분에는 당시 신라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외래품이 다수 열거되어 있다. 타슈켄트와 아랄 해 지방에서 나오는 보석이나 페르시아산 고급 모직물을 비롯해, 캄보디아⋅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나는 각종 품목이 보이는데, 당시 지배층의 외래품에 대한 선호 경향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풍조는 특히 경주의 진골 귀족 사이에서 만연했으며, 그 결과 신라 왕경은 점점 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도시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834년 흥덕왕은 이와 같은 사치 풍조를 규제하기 위해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은 ‘금지하는 법령’이라는 의미에서 ‘금령(禁令)’이라고도 부르는데 신분에 따라 색복, 거기, 기용, 옥사 등 생활 전반에 걸쳐 규제를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령은 지방의 일반 백성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 주된 대상은 진골 귀족으로서 지배층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1차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은 상하가 있고, 그에 따라 호칭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라고 한 것에서, 신분제적인 규제를 통하여 골품제를 재확립하고자 한 의도도 읽을 수 있다. 나아가 흥덕왕은 이 규정을 통하여 골품제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왕실의 지위를 강조하고, 그것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흥덕왕 대의 규정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색복과 관련한 규정에서는 신분별로 남녀를 구분하여,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나 관(冠)⋅겉옷⋅바지저고리⋅허리띠⋅버선⋅신발은 물론 빗과 비녀 등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서 어떠한 재료로 만든 것들을 착용할 수 있는지 자세히 정해 놓았다. 또한 거기(車騎)조에서는 수레 재목⋅바닥 깔개⋅휘장을 비롯하여 소의 굴레 및 가슴걸이⋅고리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세하게 규제하였으며, 기용(器用)조에서는 “진골은 금⋅은 및 도금을 금한다.” 등과 같이 신분마다 사용해서는 안 되는 용기의 재료를 명시해 놓았다. 그리고 옥사(屋舍)조에서는 가옥의 길이와 넓이를 비롯하여, 기와⋅처마⋅계단⋅담장⋅발⋅병풍⋅침상 등의 장식 재료에 이르기까지 여러 조항을 자세히 규정해 놓았다.

이와 같은 흥덕왕의 금령이 실효를 발효했는지는 의문이다. 신라 경주인의 사치풍조는 수그러든 기색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심해져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흥덕왕 대의 왕권과 정치적 상황으로는 이 법령에 의한 사회 개혁이 성공하기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결국 흥덕왕 대의 개혁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신라 사회는 사치와 향락으로 더욱 부패해 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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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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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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