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초의 의복 제도는 색상에 대해 살펴볼 수 없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이르러 비로소 6부(六部)
사람이 입는 복색의 높고 낮음을 제도로 정하였지만, 여전히 오랑캐의 풍속과 같았다. 진덕왕(眞德王)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金春秋, 604~661)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조서로써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옷과 허리띠를 주었다. 드디어 [김춘추가]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中華)의 것으로 바꾸었다. 문무왕(文武王) 4년(664)에 또한 부인의 의복을 고치니, 이 이후로는 의관이 중국과 같게 되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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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대의 제도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부터 대아찬(大阿湌)까지는 자주색 옷을 입고 아찬(阿湌)부터 급찬(級湌)까지는 다홍색 옷을 입는데, 모두 아홀(牙笏)을 쥐었다. 대나마(大奈麻)⋅나마(奈麻)는 푸른색 옷을 입고 대사(大舍)부터 선저지(先沮知)까지는 누런색 옷을 입었다. 이찬(伊湌)⋅잡찬(迊湌)은 비단관을 쓰고 파진찬(波珍湌)⋅대아찬⋅금하(衿荷)는 붉은 관을 썼다. 상당(上堂) 대나마(大奈麻)와 적위(赤位) 대사(大舍)는 갓끈을 매었다.
흥덕왕(興德王)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834)에 하교(下敎)하기를,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높고 낮음이 있어서 [그에 따라] 호칭이 같지 않고 의복 또한 다른 것이다. 그런데 풍속이 점차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호사스러움을 다투게 되어, 단지 외래 문물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촌스러움을 혐오하니, 예절이 자기 분수를 넘는 폐단에 자주 빠지고 풍속은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감히 옛 제도에 따라 밝은 명령을 펴니, 만약 [이를] 고의로 범한다면 진실로 형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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