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통일 신라와 발해신라 말 농민들의 봉기

진성여왕대의 혼란과 전란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최치원(崔致遠) 지음

당나라 19대 황제가 중흥(中興)을 이루었을 때 전쟁과 흉년의 두 재앙이 서쪽에서 멈추어 동쪽에 와서, 나쁜 중에 더욱 나쁜 것이 없는 곳이 없고 굶어 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였다. 해인사의 별대덕(別大德)인 승훈(僧訓)이 이를 애통해 하더니 이에 도사(導師)의 힘을 베풀어 미혹한 무리의 마음을 이끌어 각자 벼 한 줌을 내게 하여 함께 옥돌로 삼층을 쌓았다. 그 발원 법륜의 계도(戒道)는 크게 보아 호국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중에서 특별히 억울하게 죽어 고해(苦海)에 빠진 영혼을 구해 올려 제사를 지내서 복을 받음이 영원히 그치지 않고 이에 있도록 함이다.

때는 건녕(乾寧) 2년(895, 진성여왕 9년) 7월 16일에 적는다.

대장(大匠)은 승려 난교(蘭交)이다.

(음기(陰記))

건녕(乾寧) 2년 을묘년(乙卯年) 7월의 운양대(雲陽臺) 길상탑기(吉祥塔記)

석탑은 3층으로 전체 높이가 1장 3척이다. 전체 비용은 황금 3푼, 수은 11푼, 구리 5정, 철 260칭, 숯 80섬이다. 만든 비용이 모두 조(租) 120섬이다.

장사(匠士)는 승려 난교와 승려 청유(淸裕)이고, 부장사(副匠士)는 거불(居弗)과 견상(堅相)과 구조(具祖)이다.

담당 유나(維那)는 승려 성유(性幽)와 승려 인정(忍淨)과 걸사(乞士) 석의(釋宜)이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海印寺妙吉祥塔記. 崔致遠撰.

唐十九帝 中興之際 兵凶二災 西

歇東來 惡中惡者 無處無也. 餓殍

戰骸 原野星排 粵有海印寺別大

德僧訓 衋傷痛于是 乃用施導師

之力 誘狂衆之心 各捨芧實一科

共成珉甃三級 其願輪之戒道也

大較以護國爲先 就是中 特用拯

拔 寃橫沈淪之魂識 禴祭受福 不

朽在玆 時乾寧二年申月旣望記

大匠 僧蘭交

(陰)

寧二卯年相月 雲陽臺 吉祥塔記

石塔三層 都高一丈三尺

都費 黃金三分 水銀十一分 銅五鋌

鐵二百六十秤 炭八十石 作造料幷租百廿石

匠士 僧蘭交

僧淸裕

副 居弗 堅相

具祖

勾當維那

僧性幽

僧忍淨

乞士釋宜

海印寺 妙吉祥塔記

이 사료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9년(895) 7월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진 비문이다. 모두 4개의 전판(塼板)으로 이루어졌는데 895년에 조성되어 해인사 부근의 석탑에서 나온 일괄 유물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로 불린다. 그 각각은 「해인사묘길상탑기」, 「운양대길상탑기(雲陽臺吉祥塔記)」, 「백성산사길상탑중납법침기(百城山寺吉祥塔中納法賝記)」, 「오대산사길상탑사(五臺山寺吉祥塔詞)」, 「곡치군(哭緇軍)」, 「해인사호국삼보전망치소옥자(海印寺護國三寶戰亡緇素玉字)」 등이다. 해인사 탑지의 찬자는 최치원이고, 오대산사 탑지의 찬자는 승훈(僧訓)이다.

이 탑지들은 신라 말기 지방 세력의 동향을 추정하게 하고,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승군(僧軍)의 활약을 확인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라 말기에 성행하던 조탑(造塔) 신앙과 조탑과 관련한 경전도 확인할 수 있다. 해인사 탑지 가운데 제1판은 길상탑을 건립하는 원문과 건립 자원(資源) 및 건립 집단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고, 제2판은 전망자(戰亡者)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오대산사 탑지에는 ‘곡치군’이라는 제목으로 서문과 탑사가 실려 있고, 백성산사 탑지에는 탑에 봉안한 법침(法賝)의 목록이 적혀 있다.

진성여왕 때에 해인사 부근에서 치열한 전란이 있었고, 이 전란에서 사망한 승군(僧軍)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탑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운양대에 세운 탑에 쓴 탑지이다. 이밖에 따로 승군의 이름을 적어 넣은 전판이 있어 해인사 묘길상탑의 이름을 딴 자료는 모두 2매이다. 그런데 오대산사와 백성산사에도 길상탑을 세우고자 했으나 현실적 사정으로 여의치 못하여 이 2매의 탑지도 해인사 길상탑에 안치하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이들 4매 모두 해인사 탑에 봉안된 것이다. 그리고 오대산사 탑지를 지은 승훈은 해인사 탑지를 조성한 인물로 나오므로, 이 오대산사는 강원도 오대산이 아닌 해인사 근처의 오대산사(혹은 청량사(淸凉寺))로 생각된다. 백성산사도 마찬가지로 해인사 부근의 절이었을 것이다.

이 자료들은 신라 말의 구체적인 사회상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나쁜 중에 나쁜 것이 없는 곳이 없고 굶어 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였다.” 혹은 “사람들이 향배를 잊고 행동하는 것이 난폭한 맹수와 같다.” 등의 표현은 당시 신라의 참혹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

이렇듯 신라 사회가 전란에 빠져든 것은 889년(진성여왕 3년) 무렵으로 곳곳에서 초적(草賊)이 난무하였다. 불교 사원 또한 초적의 약탈과 전란을 피하지 못하였다. 탑지에서 보이는 “맹수들이 10년간 승려를 괴롭혔다.”라던가 “불법(佛法)이 다시 멈추었다.”라는 표현들은 사원과 승려들이 겪은 피해의 면면을 잘 보여 준다. 해인사는 승려와 속인을 포함하는 자체 무장력을 갖추고 초적들의 약탈을 막아 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원을 지키다 희생된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895년 길상탑을 세우고 탑기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해인사호국삼보전망치소옥자」에는 56명에 달하는 사망자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는 신라 말에 이미 승군이라는 조직이 존재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초적의 활동은 890년대 중반부터 토착 유력자들이 자위 조직을 갖추고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가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9세기 후반의 해인사와 신라 왕실의 후원」,『신라문화』28,김상현,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6.
「최고운의 환국시기⋅귀로와 길상탑기에 대하여」,『어문학』31,서수생,한국어문학회,1974.
「최치원의 화엄승전 찬술과 해인사의 화엄사상」,『신라사학보』창간호,장일규,신라사학회,2004.
「신라하대 해인사와 화엄종」,『한국사연구』49,최원식,한국사연구회,1985.
「해인사전권과 묘길상탑기」,『역사와 현실』24,하일식,한국역사연구회,1997.
저서
『가야산 해인사지』, 이지관, 가산문고, 1992.
『한국고대사의 연구』, 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편저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고대편』, 김철준⋅최병헌 공편, 일지사, 1986.
『해인사』, 이재창 외, 대원사, 2006.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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