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 이씨(慶源李氏)는 국초부터 대를 이어 대관(大官)이 되었다. 창화공 이자연(李子淵, 1003~1061)에 이르러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호(顥)는 경원백이 되었고, 정(頲)⋅의(顗)⋅안(顔) 세 아들은 모두 재상에 이르렀다. 한 딸은 인예태후이며 두 딸은 모두 궁주가 되었다. 아우 복야(僕射
고려 시대에 상서성에 속한 정2품 벼슬
자상(子祥)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예(預)와 오(䫨)로 재상이 되었다. 그 자손도 모두 종실과 혼인하였으니, 임금의 인척이 번성함은 고금에 드문 일이었다. 처음 의(顗)가 간원(諫垣)
사간원
에 있을 때 음양가들은 각기 도참을 고집하여 서로 비보할 것을 말하였다. 임금이 이를 물으니 의가 대답하길, “음양은 대역(大易)
주역
을 본으로 하는데 역에는 지리비보(地理裨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후세 허망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이를 마음대로 바꿔 문자로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물며 도참은 헛되고 괴이하고 요망한 것으로 하나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라 하였다. 임금도 마음으로 그렇다 하였다. 정(頲)⋅의(顗)⋅오(䫨)의 자손들은 지금에 이르러서 더욱 출세하였다. 창화공은 용수(龍首)
장원급제자
로서 재상이 되어 시험을 관장하여 인재를 얻었다. 평장 최석, 평장 김양감, 참정 최사훈⋅박인량, 학사 최택⋅위제만 등이 그 문생이었다. 어떤 이가 시를 지어 이르길, “뜰 아래 지란(芝蘭)
훌륭한 자제
은 세 정승이요, 문 앞의 도리(桃李)
문생 혹은 문인을 칭함
는 열 공경이라네”라 하였다.『보한집』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