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고려 시대고려의 사회 시책과 풍속

무당의 풍속이 크게 행해짐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근래에 무당의 풍속이 성행하여 음탕하고 격에 맞지 않는 제사가 날로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모든 무당들을 멀리 내쫓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무당들은 겁이 나서 재물을 모아 은병(銀甁) 100여 개를 사서 권귀(權貴)에게 뇌물로 썼다. 권귀들이 아뢰기를, “귀신이란 형체가 없는지라 그 허실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당을 일체 금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금지를 늦추게 하였다.

『고려사』권16, 「세가」16 인종 9년 8월 병자

日官奏, 近來巫風大行, 淫祀日盛. 請令有司遠黜群巫. 詔可.

諸巫患之, 歛財物貿銀甁百餘賂權貴. 權貴奏曰, 鬼神無形, 其虛實, 恐不可知. 一切禁之未便. 王然之, 弛其禁.

『高麗史』卷16, 「世家」16 仁宗 9年 8月 丙子

이 사료는 1131년(인종 9년) 8월 무당들의 풍속이 유행할 것을 염려한 일관(日官)과, 이에 대해 무당이 돈을 모아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써 연기⋅무마시킨 과정을 담고 있다.

무당을 쫓아내려 했던 일관은 어떤 존재였는가? 일관은 사천대(司天臺) 태사국(太史局)에 속하여 천문 관측⋅역법⋅측후⋅각루(刻漏) 등의 일을 맡았던 관원의 총칭이다. 이 외에 점복과 도참지리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관은 국왕에게 일식이나 월식 등 천변에 대해 보고하였으며, 국왕 행차 가부와 행차 날짜를 정하기도 하였다. 남경 천도 움직임이 있을 때는 궁궐 건설 관련 일을 맡았으며, 송악 등의 산천비보와 재해를 물리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일관이 1131년 2월 무풍(巫風)이 일어 음사(淫祀)가 늘어난 점을 지적하였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을까?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대는 정치⋅사회적으로 고려 왕조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이미 1123년(인종 1년)에 사방에서 유사가 장차 민간의 어린아이를 뽑아 강에 던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동요가 있었다. 심지어 이 때문에 도망쳐 산속에 숨는 자도 생겼다. 1126년(인종 4년)에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결정지었고, 인종은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 ?~1126)에 의해 독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마침내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다.

이듬해 이자겸이 제거되었지만 그를 도와 궁궐 소실의 원인을 제공한 척준경(拓俊京, ?~1144)이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이후 인종은 자주 서경에 행차하면서 묘청(妙淸, ?~1135)과 일자 백수한(白壽翰, ?~1135) 등을 가까이 하였다. 이들은 개경 지기 쇠왕설을 거론하면서 서경 천도를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1128년(인종 6년)에는 조서를 내려 천문에 변화가 있고 시후(時候)가 고르지 못하므로 은혜 베푸는 정치를 열어 재이(災異)를 없애고자 하였다. 또한 묘청과 백수한과 더불어 임원역지(林原驛地)에 신궁을 세우고자 하였다. 1130년(인종 8년) 가뭄이 심하자 묘사(廟祠)와 산천에 기우제를 올렸고, 1131년(인종 9년) 6월 음양회의소(陰陽會議所)에서 중과 속인 잡류들이 만불향도(萬佛香徒)라 칭하며 사회 문란과 풍속 파괴를 일삼자 이를 금해야 한다고 아뢴 바 있었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을 볼 때 인종 대는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한 기운이 만연해 있었다. 개경 중심 귀족 사회의 불안함이 지속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관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풍으로 인한 음사가 늘어 사회불안이 조장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가라앉히기 위한 방안으로 무당을 멀리 내쫓을 것을 인종에게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무당들이 뇌물을 써 이를 무마하였다는 것을 보면 불안함은 더욱 커져 큰 혼란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1135년(인종 13년) 서경 천도 등을 시도한 묘청의 난이 그것이었다. 이때는 935년(태조 18년) 및 936년 신라와 후백제를 통일한 지 200주년 되던 때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이후 인종 대에 무당들의 활약상을 보면 더욱 극대화된 면이 있었다. 즉 1146년(인종 24년) 정월 인종이 병이 들자 무당들이 척준경 때문에 그렇다 하여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다. 그래도 병이 낫지 않자 복자(卜者)가 이자겸 때문이라 하니 그 처자를 인주로 옮겼다. 또 같은 달에는 무당의 말을 듣고 병환을 고치기 위해 내시 봉설(奉說)을 보내어 김제군에 신축한 벽골지의 제방을 끊게 하는 등 무당은 오히려 왕실과 가까워졌음이 보인다.

결국 이 사료를 통해 인종 초반부터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까지 고려 사회의 불안함이 간헐적으로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보면 불안한 사회심리를 배경으로 무당들이 크게 득세하여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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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음사적 성황제의 양상과 그 성격-중화 보편 수용의 일양상-」,『역사학보』204,최종석,역사학회,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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