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12년 3월) 처음에 전주 사록(司錄)
'명종' 관련자료
경⋅도호부⋅목에 설치되어 수령을 보좌하던 정7품 외직
진대유(陳大有)가 자못 자기의 청렴함을 믿고 형벌을 혹독하게 해 백성들이 모두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러던 중 나라에서 정용⋅보승군(精勇保勝軍)을 보내 관선(官船)을 만들게 했는데, 이때 진대유가 상호장(上戶長)
향리들의 우두머리
이택민(李澤民) 등과 함께 매우 가혹하게 공사를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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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두(旗頭) 죽동(竹同) 등 6명이 관노(官奴)와 여러 불평자들을 불러 모아 난을 일으켜, 진대유를 산속의 절간으로 쫓아내고 이택민 등 10여 명의 집을 불태우니 향리
들이 모두 도망치고 숨었다. 그 길로 판관(判官) 고효승(高孝升)을 위협해 주(州)의 관리들을 교체하게 하니, 고효승은 단지 도장만 찍을 따름이었다.
'향리' 관련자료
안찰사(按察使)
는 진대유에게 형틀을 씌워 서울로 압송하고, 적들에게 (불복했을 때 닥쳐올) 화(禍)와 (복종했을 때 닥쳐올) 복(福)으로써 타일렀으나 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道) 안의 군사를 동원해 그들을 공격하자, 적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최고 지방 행정구역인 5도의 장관
박유보(朴惟甫)가 전주로 들어오자 적들은 군대를 크게 정렬하고 진대유의 불법 행위를 열거하며 호소하였다. 안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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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찰사' 관련자료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름 4월 무신일에 합문지후(閤門祗候)
국가 의식을 맡아 보던 합문 소속의 관리
배공숙(裴公淑)과 낭장(郞將)
중앙군에 소속된 정6품 무관
유영(劉永) 등을 파견해 죽동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묻게 하였다. 공숙 등이 성에 들어가서 일품군(一品軍)
주현군 중 하나로 주로 토목과 공사 등을 맡음
의 대정(隊正)
25명으로 구성된 대라는 단위 부대의 장
(사기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을 회유하여 적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계획이 성사되려 할 때 참소를 입어 파면되고, 낭중(郞中)
상서성 등에 소속된 정5품 관직
임용비(任龍臂)와 낭장 김신영(金臣穎)으로 대체되었다.
안찰사
가 보낸 관군이 성을 공격한 지가 벌써 40여 일이나 되었으나 항복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품군의 대정이 승려들과 함께 죽동 등 10여 명을 죽이면서 반란이 평정되었다. 기사일에 임용비⋅김신영 등이 도착해 적의 잔당 30여 명을 수색해 죽인 다음 성과 참호를 허물고 돌아왔다.
'안찰사' 관련자료
5월 을해일에 백관들이 왕에게 전주가 평정된 데 대하여 축하를 드렸다.
『고려사』권20, 「세가」20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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