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에서 계하기를, “『원(元)⋅속육전(續六典)』에 실려 있는 여러 해 동안 내린 판지(判旨)를 서울에서나 지방 관리들이 받들어 시행하지 아니하니, 그 받들어 시행하지 않는 조항을 삼가 기록하여 올리오니, 청컨대 지금부터 더욱 명백히 거행하도록 하고, 이에 어긴 자는 논죄하소서. ……(중략)……
1. 영락 11년(1413, 태종
13) 사간원의 장계인데, 불교라는 것은 군신의 의리도 없고 부자의 은혜도 없이 허황되고 허망한 말을 가지고 망령스럽게 은혜를 갚는다는 말을 붙여서 세상을 현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며 풍속을 패망케 하니, 우리 유도(儒道)에 해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옛날 당(唐)⋅우(虞) 3대 때에 나라가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사람의 수명도 길었는데, 이것은 실로 부처가 그렇게 하여 준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불법(佛法)이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명제(明帝) 이후로부터 난리와 패망이 계속되어 국운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그 뒤에 양나라⋅진나라⋅후위 때에는 부처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하였으나, 나라의 존속은 더욱 단축되었고, 드디어 불교의 계율을 지킨 임금으로서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는 화1)
를 당하게 되었으니, 부처를 섬겨서 복을 구하였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를 믿을 것이 없음은 변론할 것도 없이 명백한 일입니다.
'태종' 관련자료
1)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는 화 :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믿다가 후경(侯景)의 반란을 만나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은 고사이다. 대성은 남북조 시대 천자의 어소(御所)를 말한다. 양 무제는 동태사(東太寺)를 대성 안에 짓고, 대불각 7층을 만들어 국고를 낭비하다가 백성의 원망을 샀는데 이 틈을 타고 후경의 반란이 발생하였으며, 양무제는 대성에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
어리석고 무식한 자는 책망할 것도 없으려니와, 세상에서 고명하였다고 하는 자도 또한 여기에 혹하여 섬기는 것은 어떤 까닭입니까? 대개 사악한 말이 틈을 타고 들어와서 유혹하게 되면, 미치기는 쉬우나 깨어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상이나 처자상을 다하여 애통 박절한 때에, 그 틈을 타서 복전(福田)
부처와 보살 법사들에게 공양하고 삼보(三寶)를 숭봉하면 복덕(福德)의 열매를 얻게 됨
의 이익이라는 말로 꾀어 차츰차츰 그 가운데로 들어가서 가산을 탕진하기에 이르니 사악한 말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크게 개혁하였으니, 진실로 천 년 동안에 없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거나 승려에게 재를 드리는 일은 아직 낡은 습속을 고치지 못해, 사람이 죽으면 모두 좋은 길로 가게 한다 하면서 이미 칠칠재(七七齋)를 올리고, 또 법석(法席)의 모임을 만들어, 무식한 무리들이 오로지 겉만 화려한 것만 숭상하여 남의 이목에 자랑만 하려 합니다. 만일 부처가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사람의 죄를 구원해 준다면, 이것은 벼슬과 옥사(獄事)나 팔아먹는 탐관오리가 하는 일이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있는 것이요, 재앙과 복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비록 부지런히 빌어도 부처가 어떻게 그 사이에 은혜를 베풀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오니, 전하께서 관련 관서에 명하여 상장과 제사 의식은 일체 『문공가례(文公家禮)
』에 의하도록 하고, 부처에 대한 일은 엄금케 하여 여러 사람의 의혹을 끊어 없애게 하소서” ……(중략)…… 이상 30가지 조목을 다 그대로 따랐다.
'문공가례(文公家禮)' 관련자료
『세종
'세종' 관련자료
형조에 전지(傳旨)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의 상(喪)⋅제(祭)의 법이 고려의 비루한 풍습을 많이 따르므로, 금지하는 법을 세워서 『육전』에 실었으나, 유사가 능히 규찰하지 못하여 예전 습관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바르게 될 날이 기약이 없다. 지금의 민간 풍속이 평상시에는 귀천을 논함이 없이 다투어 음사(淫祀)2)
를 숭상하고, 무당[巫覡]을 높이 신뢰해서 재물과 곡식을 허비한다. 상(喪)을 당하게 되면 혹은 무당의 집에 가서 풍악을 베풀어 신을 먹이고, 혹은 절[佛寺]에 올라가서 재(齋)를 베풀어 복을 빌며, 혹은 장삿날[葬日]에 술과 음식을 많이 베풀어서 손님과 주인이 서로 위로하되, 되도록 풍성한 것을 숭상하여, 부유한 자는 떠벌리고 빈한한 자는 억지로 따라 하면서 손님과 벗을 불러 모아, 남자와 여자가 들끓게 하여 막대한 경비를 소비한 뒤에야 마음에 만족해하고, 향리(鄕里)의 자랑거리가 된다. 이것이 풍속이 되어 절약할 줄을 모르다가, 한 번만 흉년을 만나면 곧 굶주리게 되니 진실로 답답한 일이다. 다만 민생이 이 때문에 가난하고 고생할 뿐 아니라, 풍속의 좋고 나쁨이 실로 이것에 관계되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무릇 풍악을 베풀고 군중을 모아 귀신을 음사하는 자, 상을 당한 집에서 무당에게 가서 귀신을 먹이는 자, 손님을 맞고 재를 베푸는 자, 장삿날에 술을 베푸는 자가 있으면, 서울 안에서는 사헌부가, 외방에서는 감사
와 수령이 거듭 밝혀서 엄하게 금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손님과 주인을 모두 죄주라” 하였다.
2)
음사(陰祀) : 조선 시대 유교 윤리와 명분에 어긋나는 신(神)을 제사지내는 행위이다.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는 천지산천⋅일월성신에 대한 자연숭배, 정령에 대한 신앙 등을 말한다.
'감사' 관련자료
『세종
'세종' 관련자료
-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는 화 :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믿다가 후경(侯景)의 반란을 만나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은 고사이다. 대성은 남북조 시대 천자의 어소(御所)를 말한다. 양 무제는 동태사(東太寺)를 대성 안에 짓고, 대불각 7층을 만들어 국고를 낭비하다가 백성의 원망을 샀는데 이 틈을 타고 후경의 반란이 발생하였으며, 양무제는 대성에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
- 음사(陰祀) : 조선 시대 유교 윤리와 명분에 어긋나는 신(神)을 제사지내는 행위이다.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는 천지산천⋅일월성신에 대한 자연숭배, 정령에 대한 신앙 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