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조선 후기신분제의 동요

양반층의 증가와 분화

평산 부사(平山府使) 정경증(鄭景曾)은 붙잡아 묻고, 황해 감사 엄사만(嚴思晩)은 엄하게 추고(推考)토록 명하였다.

경기 감사 서유방(徐有防)이 평산의 채정곤(蔡正坤)에게 공초(供招)를 받은 것과 관련하여 아뢴 데 대해 하교하기를,

“향전(鄕戰)1)은 통렬히 금해야 할 일이다. 달포 전에 해서(海西)의 유생이 임금께 글을 올린 데 대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넌지시 보여 주었으니, 하나는 지나친 경쟁을 억제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채정곤이 임금께 올린 글을 보건대, 대체로 그들이 향임(鄕任)의 권한을 빙자하여 함부로 날뛰는 조짐이 없었다면 해당 수령이 어찌 이와 같이 처결하였겠는가. 이러한데도 한쪽의 공초만을 편파적으로 신뢰하여 그 사이에서 한쪽을 편들고 다른 한쪽을 억누른다면, 이는 분란을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공사(供辭)는 시행하지 말고, 조정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해당 관찰사를 엄히 꾸짖게 하되, 관찰사가 임금이 허가한 내용을 가지고 모든 마을의 유생을 거듭 타일러서 구향(舊鄕)과 신향(新鄕)으로 하여금 각각 구습을 통렬히 혁파하고 기어코 화합하게 하라. 이와 같이 하교한 뒤에도 구향과 신향을 막론하고 다시 본읍(本邑) 유생의 일로 임금께 아뢰는 일이 있으면, 이는 국법을 어지럽히는 백성이니 유생으로 대우할 수 없다. 따라서 중죄를 적용하여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일체 엄히 경계하게 하라. ……(하략)……

일성록』, 정조 9년 9월 6일

1)향전(鄕戰) : 향청(鄕廳)의 향임(鄕任) 선발을 둘러싸고 구향(舊鄕)과 신향(新鄕)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말한다. 향청은 조선 전기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사족의 주도 아래 건립⋅운영되는 향촌 자율 기구였으나, 후기로 넘어오면서 수령에게 예속된 지방 행정기구로 변모하였다. 이는 기득권 세력과 새롭게 부를 축적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는 세력, 즉 구향과 신향이 향임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을 불러왔다.

命平山府使鄭景曾, 拿問, 黃海監司嚴思晩, 重推.

京畿監司徐有防, 以平山蔡正坤捧供馳啓, 敎以, 鄕戰在所痛禁。月前海儒之封章也微示不槪之意, 一則抑奔竸, 一則爲鎮安也。 觀此蔡正坤上言, 大抵渠輩如無憑籍跳踉之漸, 則該守令豈有如是决處乎。此而偏信一邊之供, 有所扶抑於其間, 無異於推波助瀾。此供辭勿施, 令廟堂措辭嚴飭該道伯, 以此判付辭意, 申諭該邑章甫, 俾各痛革舊習, 期底和協。如是下敎之後, 勿論甲乙, 復以本邑章甫事, 登聞之事, 是犯法之亂民, 不可以章甫待之。置之重辟, 斷不饒貸, 一體嚴飭. ……(下略)……

『日省錄』, 正祖 9年 9月 6日

이 사료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향청(鄕廳)의 임원인 향임(鄕任) 선발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향전(鄕戰)을 금하도록 한 전교 내용이다. 정조는 편파적으로 한쪽의 의견만 받아들이며 한쪽 편에 서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면서, 관찰사로 하여금 고을의 유생을 잘 타일러 구향(舊鄕)과 신향(新鄕) 사이에 있던 구습을 혁파하고 화합하도록 일렀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일로 다시 임금께 글을 올리는 자가 있다면 중죄를 적용하겠다고 하여 향전 타파 의지를 보여 주었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향권(鄕權)을 둘러싸고 여러 형태의 다툼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기존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족 세력인 구향(舊鄕) 및 그에 도전하는 세력, 곧 신향(新鄕)이 있었다. 이들 사이에 대립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향전(鄕戰)이 전개되었다. 이는 종전까지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가 붕괴되고 관 주도 통제책이 강화되던 영조정조 시기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향전이 수령권(관권)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것이 그 점을 말한다. 정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향전 금지를 강조하였지만 각지의 향전은 그치지 않았고 그 폐해는 날로 심해져 갔다. 심지어 ‘향전율(鄕戰律)’이라는 명목으로 감사와 수령의 천단(擅斷)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 주도 향촌 통제책 자체가 그를 보좌하는 이서(吏胥)와 향임(鄕任)을 매개로 하고, 이러한 향촌으로의 진출이 수령에 의해 천단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권력 구조의 취약성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배층과 새롭게 향권에 도전하던 세력 간의 향권 장악을 둘러싼 대립이 지속되는 한 향전은 확대⋅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향전은 구향과 신향 간의 향촌 운영 주도권 다툼이었지만, 수령과 향임⋅향리로 직결되는 행정 체계를 추구하던 당시의 정부나 수령의 입장에서 볼 때 수령 및 정부에 대한 구향의 저항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다툼이었다. 따라서 향전이 거듭되면 될수록 구향은 불리하게 흘러갔고 그것은 결국 구향의 지위와 영향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리하여 19세기 중엽을 전후로 신향 및 향리가 수령과의 제휴 아래 향촌 사회를 관장⋅주도하는 새로운 체제가 널리 성립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8세기말 19세기초 평안도지역 향권의 추이」,『한국문화』11,고석규,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1990.
「17⋅18세기 향촌사회 신분구조변동과 유⋅향」,『한국문화』11,김인걸,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1990.
「조선후기 사족의 촌락지배-남원둔덕지방을 중심으로-」,『한국문화』12,김현영,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1991.
「19세기 영남 금산의 양반지주층과 향내사정」,『동방학지』70,신영우,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91.
「1873년 일성록의 일부 소실과 개수」,『규장각』12,최승희,서울대학교 도서관,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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