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조선 후기도참 사상의 유행과 새로운 종교의 등장

풍수지리의 유행과 산송

임금이 밤에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전 도정(都正) 심정최(沈廷最)와 전 첨정(僉正) 윤희복(尹熙復)을 친문(親問)하였는데, 양가(兩家)의 묘지를 쓴 일로 말미암아 생긴 다툼 때문이었다. 애초에 고려 시중(侍中) 윤관(尹瓘)의 묘가 파주에 있었는데, 실전(失傳)되었다. 고(故)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묘 밑에 큰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윤관의 묘라고 유전(流傳)해 오던 것을 심씨네가 압장(壓葬)한 것이었다. 윤씨의 후손이 묘갈(墓碣) 두어 쪽을 증거로 찾아서 심씨의 무덤을 이장(移葬)해 달라고 소청(疏請)하였는데, 심씨네 역시 윤씨네의 외손(外裔)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두 집안이 각자 자기네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지 말라고 두 집안을 달래어 모두 진정시켰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윤씨의 후손이 모여서 심씨의 무덤 앞 계체(階砌)를 허물자 심씨네가 또 여러 사람을 이끌고 와서 두들겨 쫓아냈다. 이에 서로 잇따라 북을 쳐서 아뢰니, 임금이 “윤희복(尹熙復)⋅심정최(沈廷最)는 세가(世家)의 대족(大族)으로서 조정의 덕의(德意)를 본받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으며 번거롭게 잇따라 호소하였으니, 엄하게 처치하지 않으면 기강이 무너지고 풍화(風化)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친문(親問)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입직한 옥당관(玉堂官) 김노진(金魯鎭) 등은 일이 사송(私訟)에 관계되므로 유사(有司)에게 회부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깊은 밤중에 임문(臨門)하여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먼저 체직(遞職)시킨 뒤에 형리(刑吏)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어 밤을 새워 두 사람을 친문(親問)하여 형을 가한 뒤 차례로 멀리 귀양 보냈다. 그런데 심정최와 윤희복은 나이가 각기 70여 세였으므로 윤희복은 형을 받고 며칠 되지 않아서 (귀양 가는) 도중에 죽었다. 뒤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주청에 의해 그의 벼슬 임명장을 돌려주게 하였고 옥당관을 체직하라는 명령도 거두어들였다. 입시 대관(入侍臺官) 이보관(李普觀)과 윤승렬(尹承烈) 등의 상소에 좌우로 두루 감싸 준 의도가 있다고 하여 모두 파직시켰다.

영조실록』권105, 41년 윤2월 23일(무진)

上夜御興化門, 親問前都正沈廷最, 前僉正尹熙復, 以兩家訟山也. 初高麗侍中尹瓘墓在坡州, 失其傳. 故相臣沈之源墓下, 有一大塚, 流傳謂尹瓘之墓, 而爲沈氏所壓葬. 尹之後孫, 得墓碣數片, 疏請移沈之葬, 而沈亦尹之外裔故也. 上以兩家各護其墓, 毋相爭犯, 兩諭而幷鎭之. 及是尹之諸孫, 聚毁沈墓之階砌, 沈又募人摶逐. 相繼擊皷以聞, 上以尹. 沈, 世之大族, 而不體朝家德意, 互相爭奪, 繼以煩籲, 不嚴處之, 無以鎭頹綱勵風化也, 遂有親問之命. 入直玉堂官金魯鎭等, 以事係私訟, 宜付有司, 不宜深夜臨門, 致損國體求對, 而不許, 命先遞其職, 下之吏. 仍徹宵親問兩人, 刑準次遠配. 廷最. 熙復年各七十餘, 熙復受刑未踰日而死于道. 後因領議政洪鳳漢奏, 命還其職牒, 又寢玉堂官遞職之命. 以入侍臺官李普觀⋅尹承烈等, 奏語有左右周遮之意, 幷罷其職.

『英祖實錄』卷105, 41年 閏2月 23日(戊辰)

이 사료는 1765년(영조 41년) 윤2월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산송(山訟) 사건을 담고 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에는 산송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큰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산송이란 조선 시대 산소와 관련한 소송으로 조선 중기 이후 풍수 사상의 영향으로 명당에 묏자리를 만들려는 음택 풍수(陰宅風水)가 유행하면서 비롯되었다. 또한 신분제의 동요로 중인⋅상인층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선산을 뺏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 이러한 산송의 발생 계기로 크게 작용하였다. 다른 가문의 선산에 몰래 부모의 묏자리를 만들거나, 남의 묏자리 주위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 내 다툼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러한 산송은 노비와 관련한 노비송(奴婢訟), 토지와 관련한 전답송(田畓訟)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민사소송을 이루었다.

이 사료에서 나타난 산송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청송 심씨(靑松沈氏) 사이에서 윤관(尹瓘, ?~1111) 장군의 묘역을 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은 폐허가 된 윤관 장군 묘역을 파헤치고 조부 등 일가의 묘를 조성하였다. 이에 파평 윤씨가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치자, 청송 심씨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면서 다툼이 더욱 크게 번졌다. 두 문중은 조선 시대 왕비를 4명(파평 윤씨)⋅3명(청송 심씨)씩 배출한 외척 가문으로 당시 영조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하지만 국왕의 중재에도 아랑곳없이 두 집안은 치열한 쟁송을 재개했고 문중 간에 폭력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에 격노한 영조는 두 문중의 대표자 심정최(沈廷最)와 윤희복(尹熙復)을 직접 국문(鞠問)하여 귀양 보내기도 하였다.

두 문중의 다툼은 현대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2005년 청송 심씨 조상 묘 10여 기를 이장하는 대신 이장에 필요한 땅을 파평 윤씨 문중이 제공하는 것으로 양측이 합의하고, 2007년 문화재 이전이 승인되면서 400여 년을 끌어온 묘지 다툼은 일단락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풍산 류씨 화경당 고문서로 읽는 사회사: 산송을 중심으로」,『안동학연구』7,이욱,한국국학진흥원,2008.
「조선후기 산송의 실태와 성격-정조대 상언⋅격쟁의 분석을 중심으로-」,『성곡논총』27-4,한상권,성곡학술문화재단,1996.
저서
『장서각 수집 민원 소송 관련 고문서 해제』, 김소은, 민속원, 2008.
『조선조 풍수신앙 연구』, 이화, 한국학술정보, 2005.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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