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조선 후기도참 사상의 유행과 새로운 종교의 등장

정감록의 확산

무릇 참위(讖緯)란 것은 그 말이 요망하고 허황되니 군자가 말할 바가 아니요, 치세에 반드시 금하여야 하는 것이다. 『정감록』이 언제 시작됐는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모르나, 문인방(文仁邦)이 이 책을 바탕으로 존덕(尊德)으로 추대되어 서로 모의해서 거병하여 대궐을 범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심한 도적이 되었으니, 책의 조리가 없고 말의 헤아릴 수 없음을 알 만하다. 애초에 조정이 법도 외에 두고 책임 등을 묻지 않았는데, 사태를 깨달아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명령을 내려 이 책을 금하고 소장하는 자는 죄가 문인방과 같게 하니, 이를 백성이 모를 리가 없다.

무릇 이 책을 금하고 소장하지 못하게 한 것은 어찌 당당한 임금께서 참위를 듣기가 싫어 금하겠는가? 진실로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기 때문에 요망하고 허황된 설에 쉽게 어지럽게 되어 서로 미혹시켜 빠르게 죽을죄에 이르게 되므로 금한 것이니, 백성에게 의혹이 없게 하여 죄와 허물에서 멀게 하려는 것이다.

무릇 가르치지 않고 벌주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조정의 마음을 편안히 놓음은 반드시 회복되어 궁한 다스림은 다시없을 것이니, 바다의 사람도 또한 성덕을 알 것이요, 모른다면 천성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백성이 혹 이 책을 소장하고도 조정의 명령을 아직 듣지 못했다면 바로 이 책을 가지고 공문(公門)에 나가 모두 태워 없애야 한다. 만약 없애더라도 공문을 통해서 한 것이 아니라면 없애지 않은 것과 같다. 35방의 사람이 이 뜻을 아니, 방(榜)이 이른 날에 즉시 명령대로 해야 한다.

『자저』권29, 방상, 각방금정감록방(계묘)

夫讖緯者, 其說妖謊妄誕, 君子之所不言, 治世之所必禁也. 鄭鑑錄不知其始於何時, 出於何人. 而仁邦藉是書而推尊德, 相謀擧兵犯闕. 遂爲劇賊, 書之不經, 語之罔測可知也. 始朝家置之度外不問, 及事覺 戮其渠首, 下令禁此書, 有藏者罪與仁邦等, 民不可不知也. 夫所以禁此書毋藏者, 豈堂堂聖朝惡聞讖緯爲是禁哉? 良由民至愚, 易淫於妖謊妄誕之說, 轉相誑惑, 乃駸駸入於死罪, 故爲是禁, 使民無惑, 遠於罪過也. 夫不敎而刑之, 是罔民也. 朝家釋安必復, 不復窮治, 海之人亦可以知聖德矣, 不知則非秉彜之心也. 民或藏此書而未及聞朝廷之令, 亟取書詣公門, 悉焚毁之. 雖或毁之, 不由公門, 與不毁同. 三十五坊之人知此意, 榜到之日, 急急如律令.

『自著』卷29, 榜狀, 各坊禁鄭鑑錄榜(癸卯)

이 사료는 조선 후기 고문에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받던 저암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지은 시문집 『자저(自著)』에 수록된 내용이다. 1783~1784년(정조 7~8) 그가 해주 판관으로 있던 시절 각 방의 부호들에게 『정감록』을 금할 것을 단단히 타일러 경계한 방문(榜文)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참위(讖緯)란 요망하고 황당하며 반드시 금해야 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참위서인 『정감록』은 내용이 조리가 없으며 어리석은 백성이 죄와 허물을 갖게 되므로,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금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해주 판관으로 부임하기 전인 1782년(정조 6년) 백천제(白天湜)⋅문인방(文仁邦)⋅이경래(李敬來)⋅곽종대(郭宗大) 등이 충청도 진천 산골에 들어가 『정감록』의 비기(秘記)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면서 흉도들을 모집해 관아를 약탈하고 군기를 탈취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힌 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인 문인방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정감록』은 종래 단편적인 참설과 비기류를 편집한 책으로,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漢隆公)의 아들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 왕조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라는 인물의 대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전란에 대한 공포 의식을 담은 병란설, 곧 닥쳐 올 병란을 예고하면서 이에 대비해 피신처로서 풍기⋅예천 등을 비롯한 10승지(十勝地)가 있음을 강조한 피란설, 이 시기 정치 기강의 문란, 봉건적 수탈의 심화로 인한 민생 도탄 등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말세론 등이 담겨 있다. 또한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점쳐서 정해진 피난처에서만 지극한 복을 누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정씨(鄭氏) 성의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정감록』과 관련해 여러 정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상주 사람 배윤현이 대궐문에 괘서(掛書)한 사건, 1748년(영조 24년) 이지서(李之曙) 사건, 1755년(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 등이 대표적인 관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782년에는 백천제⋅문인방⋅이경래⋅곽종대 등이 충청도 진천 산골에 들어가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면서 흉도들을 모집하여 관아를 약탈하고 군기를 탈취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이 퍼뜨린 ‘터무니없는 말’은 『정감록』의 비기를 의미한다.

이는 지배 체제의 모순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즉 기존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말세의 도래, 왕조 교체, 변란 예고 등 현실 부정적인 성격의 도참사상이 유행했는데, 『정감록』은 당시 사회변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정조조 정감록 관련 역모사건에 대하여-이경래⋅문인방 사건을 중심으로」, 『하석김창수교수화갑기념 사학논총』, 고성훈, 논총간행위원회,1992.
「조선후기 천주교와 《정감록》: 소문화집단의 상호작용」, 『교회사연구』30, 백승종,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9세기 민중운동과 민중사상; 후천개벽, 정감록,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역사비평』2, 우윤, 역사문제연구소, 1988.
저서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백승종, 푸른역사, 2006.
편저
『민란의 시대』, 고성훈 외,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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