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은 나라에 있어 사람을 고무시키고 격려하는 단서이니, 상만 주고 벌을 주지 않는 것은 곧은 이를 들어 쓰기만 하고 잘못된 이를 내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러한 일의 이치에 대하여 우상(右相)
하는 자리에서 아뢰었으니, 이 때문에 이를 기꺼이 듣고 조처하는 즈음에 묵묵히 행하게 된 것이다. 현재 시끄러운 일로 말하자면, 서양의 서적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지가 이미 수백 년이나 되었다. 이에 사고(史庫)와 옥당(玉堂)
우의정
이 일찍이 경연
'경연' 관련자료
홍문관
에 예전부터 소장해 오던 것 중에도 모두 들어 있었는데, 무려 몇십 편질(編帙)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전에 특명으로 이것들을 모두 거두어다 내다 버리라고 하였는데, 이것만으로도 서양의 책을 구입해 온 것이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故) 재상 충문공(忠文公)
서명선(徐命善, 1728~1791)
이 연경(燕京)에 가서 서양인 소림대(蘇霖戴)와 왕래하면서 그 법서(法書)를 구해 본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상제(上帝)와 대면한 가운데 자신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점에서는 애당초 우리 유학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청정(淸淨)을 논하는 황로(黃老)
도가(道家)
나 적멸(寂滅)을 주장하는 구담(瞿曇)
불가(佛家)
과는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삶과 방불(彷佛)하고 도리어 보응(報應)에 관한 논의를 취하고 있으니, 이로써 천하를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였으니, 고 재상의 말이 그 이면을 상세히 변론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혹 순전히 공격하며 배척한 경우도 있었으니, 고(故) 찰방 이서(李潊)의 시(詩)에서는 심지어 “오랑캐가 전한 이단의 학문이 도덕을 해칠까 두렵네”라고까지 하였다. 대개 근일 이전에는 박학하고 단아한 선비들이면 모두 주장을 내세워 평 (評)하는 말들을 하였는데, 완곡하게 하든 준엄하게 하든 간에 그 당시에는 별로 영향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학(正學)이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폐해가 사설(邪說)보다도 심하고 맹수보다도 더하다. 오늘날 폐단을 구제할 방도로는 정학을 더욱 밝히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특별히 착한 일을 표창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정사를 행한 후에야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형륙(刑戮)은 풍속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말단적인 방법인데, 더구나 그 학술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어제 이미 최헌중(崔獻重)을 발탁해 등용함으로써 정학을 일으켜 세우고 사학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연전에 서양 책을 구입해 온 이승훈(李承薰)에 대해서는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건 무의식적으로 했건 따질 것 없이 그를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감히 그의 집에서 편안히 지내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형정(刑政)에 관계되는 바가 크다. 이승훈의 아비가 책을 불사른 증거와 그 후에 이승훈이 글을 지어 자기 죄를 털어 놓은 한 가지 조목은 또한 공가(公家)의 문적(文蹟)에 드러나 있다. 그렇기는 해도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고쳐먹은 것이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저지른 것인 만큼 이름이 이미 상소문
에 올라와 있는데도 즉시 처분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는 의리에 어긋날 것이다. 전 현감 이승훈을 예산현(禮山縣)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라.
'상소문' 관련자료
이 밖에 서민들 가운데 상을 주고 벌을 줄 만한 무리가 있다면 이는 유사(有司)가 처리할 일이니, 묘당
에서 유사를 신칙하도록 하라. 실로 성심껏 권면하고 징계하되 요동시키지도 말고 따라가기만 하지도 말며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않는다면 그 효과를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내 뜻을 다 펼쳐 보인 이후에도 다시 그 학술에 관한 일로 수응(酬應)하게 된다면 조정다운 조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묘당' 관련자료
『홍재전서』권34, 교5, 척사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