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조선 후기도참 사상의 유행과 새로운 종교의 등장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저항-황사영 백서

좌포장(左捕將) 임율(任嵂)과 우포장 신응주(申應周)가 사학죄인(邪學罪人)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흉서(凶書)를 가지고 합문(閤門) 밖에 나오니, 들여보내라고 명하여 살펴본 후에 국청에 내리었다. 죄인 황사영은 사족으로서 사술(邪術)에 미혹됨이 가장 심한 자였는데, 의금부에서 체포하는 처음에 기미(機微)를 미리 알고 망명하여 혹은 상복(喪服)을 입고는 성명을 바꾸고 혹은 토굴에 숨어서 종적을 감추어 반년이 지나기에 이르렀다. 포도청에서 은밀히 염탐하여 지금에야 제천 땅에서 붙잡아 그의 문서를 수색하니 백서(帛書)가 있는데, 장차 북경의 천주당에 통하려고 한 것이었다. 서폭(書幅)에 꽉 찬 흉악하고 참람한 말은 주문모(周文謨) 이하의 여러 죄인이 복법(伏法)되었다는 일을 서양인에게 상세히 보고하려 한 것으로, 그 중에 세 조항의 흉언(凶言)이 있는데 하나는 황지(皇旨)를 얻길 꾀하여 조선에 교유(敎諭)하여 서양인을 가까이 교제하도록 함이었고, 하나는 안주(安州)에 무안사(撫按司)를 열어 친왕(親王)이 국생(國生)을 감시하고 교훈을 모으도록 명하게 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려 함이었고, 하나는 서양국(西洋國)에 통하여 큰 선박 수백 척에 정예 병사 5만~6만 명을 갖추어 보내고 대포 등 무서운 병기를 많이 싣고 와서 동국(東國)을 경악케 하여 사교(邪敎)가 행해지도록 함이었다.

순조실록』권3, 1년 10월 5일(무신)

左捕將任嵂, 右捕將申應周, 持邪學罪人黃嗣永凶書, 來詣閣外, 命入之省覽後, 下鞫廳. 罪人黃嗣永, 士族而蠱惑邪術之最甚者也, 知機亡命, 於金吾逮捕之初, 或衣衰麻而變姓, 或隱土窟而潛蹤, 至過半載. 捕廳譏詗, 現捉於堤川地, 搜其文書有帛書, 而將通於北京之天主堂者也. 滿幅凶憯, 以周文謨以下諸罪人伏法之事, 細報於西洋人, 而中有三條凶言, 一, 則圖得皇旨, 敎諭朝鮮, 使之容接西洋人也. 一, 則開撫按司於安州, 命親王監國生聚敎訓, 乘釁而動也. 一, 則通于西洋國, 裝送大舶數百艘, 精兵五⋅六萬, 多載大砲等利害兵器, 震駭東國, 使之行敎也.

『純祖實錄』卷3, 1年 10月 5日(戊申)

이 사료는 천주교인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백서와 관련된 내용이다. 조선의 천주교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이후 거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전파되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 급격하게 불어난 천주교도는 정조 말년에는 교인이 1만여 명에 달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대에 대해 보수 지배층은 큰 불안을 느꼈고, 이에 심환지(沈煥之, 1730~1802)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벽파(僻派)에 의해 상소와 박해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정조는 “사교는 얼마 가지 않아 자멸할 것이며, 이는 유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대대적인 박해로 이어지는 일은 피하려 하였다.

정조남인 계열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죽고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를 둘러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일대 박해가 벌어졌다.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純祖, 재위 1800~1834)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조 대에 수세에 몰렸던 벽파는 정적이던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즉각 정치적 대공세를 펼쳤고, 벽파의 충실한 후견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801년(순조 1년) 언문 교지를 내려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당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그 중에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였던 남인 시파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승훈(李承薰, 1756~1801)⋅정약종(丁若鍾, 1760~1801)⋅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벽(李檗, 1754~1785)⋅권철신(權哲身, 1736~1801) 등이 그들이었다. 또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를 비롯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는데,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하였다.

이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黃沁, 1756~1801)을 만난 황사영은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길이 62cm, 너비 38cm의 비단에,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이 9월 26일에 체포되어 백서는 사전에 압수되고, 황사영 자신도 9월 29일 잡히는 몸이 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 9년) 이후의 교회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해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언급하였다.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이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Mutel, Gustave Charles Marie, 1854~1933)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 순교 복자(福者) 79위의 시복식 때 교황에게 전달하였다.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세도정치기 조선 지식인의 정체성 위기: 황사영 백서를 중심으로」,『동방학지』123,박현모,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2004.
「신유박해의 성격」,『민족문화연구』13,조광,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78.
「근⋅현대 학계의 황사영 백서관」,『한국민족운동사연구』28,허동현,한국민족운동사학회,2001.
저서
『황사영 백서 연구』, 여진천,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황사영 백서 연구』, 이정린, 일조각, 1999.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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