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조선 후기민중의 불만과 저항

삼정 문란의 원인

진주 안핵사(按覈使) 박규수(朴珪壽)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민(亂民)들이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삼정(三政)이 모두 문란해진 것1)에 불과한데, 살을 베어 내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은 환곡(還穀)과 향곡(餉穀)이 으뜸입니다. 진주의 허포(虛逋)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 결과를 임금께 아뢰었고, 단성현(丹城縣)은 호수(戶數)가 수천에 불과하지만 환향의 각 곡식이 9만 9000여 석(石)이고, 적량진(赤梁鎭)은 호수가 100에 불과하지만 환향의 각 곡식이 10만 8900여 석인데, 이를 보충시킬 방도는 모두 정도를 어기고 사리(事理)를 해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탕감시키는 은전(恩典)을 또 어떻게 임금에게 아뢰는 대로 번번이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병폐를 받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 마땅히 이런 때에 미쳐서는 특별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하고, 적임자를 잘 선발하여 위임시켜 조리를 상세히 갖추게 하되, 혹은 전의 것을 따라 겉모양을 꾸미기도 하고 혹은 옛것을 본받아 더하거나 빼기도 하면서 윤색하여 두루 상세히 갖추게 한 후에 이를 먼저 한 도(道)에다가 시험하여 보고 차례로 통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고도 폐단이 제거되지 않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왕이 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내용은 의정부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철종실록』권14, 13년 5월 22일(계묘)

1)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을 지칭한다. 전정은 토지에 세금을 매기는 수취 행정으로서 1444년(세종 26) 제정된 공법(貢法)의 전품육등법(田品六等法)과 연분구등(年分九等)에 준하여 전세를 부과하였으나, 세분화된 기준을 그대로 지키지는 못하였다. 군정은 병무 행정으로 본래 군적(軍籍)에 따라 번상병(番上兵)을 뽑고 번상병의 경비를 지원하는 보인을 두어 이들이 보포(保布)를 내게 하는 방식이었으나, 곧 군포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환정은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돌려받는 구빈(求貧)과 비축을 겸한 행정이었으나, 정부의 재정 부족이 심화되면서 이자를 붙여서 환수하기 시작함으로써 본래 목적을 잃고 조선 후기 부세의 수단이 되었다.

晋州按覈使朴珪壽, 上疏略曰. 亂民之自陷. 必有由焉. 卽不過三政之俱紊, 而若其剝膚切骨, 惟還餉居其最矣. 晉之虛逋, 旣有査啓專論, 而丹城縣戶, 不過數千, 而還餉各穀, 爲九萬九千餘石, 赤梁鎭戶, 不過一百, 而還餉各穀, 爲十萬八千九百餘石, 充補之方, 都是違經害理之說. 朝家蠲蕩之恩, 又豈隨聞輒施之事哉. 只是受病者吾民而已. 宜及此時, 別開一局, 揀選委任, 悉具條理, 或因舊而修飾, 或師古而增損, 潤色周詳, 然後擧而先試, 一道次第通行. 如是而(弊)〔弊〕未祛民未安者, 臣未之聞也. 批曰, 所陳令廟堂稟處.

『哲宗實錄』卷14, 13年 5月 22日(癸卯)

이 사료는 『철종실록』 1862년(철종 13) 5월 22일조에 수록되어 있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상소’이다. 진주 농민 항쟁의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가 농민 항쟁을 수습한 뒤, 그 원인에 대해 조사하고 이를 임금에게 아뢰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철종 연간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지배층에 의한 농민 수탈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농민 수탈의 주 내용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요약되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문란이 바로 그것이다.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結)당 4두(斗)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납부하도록 하였으나 전라, 경상 지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이 증가하면서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기 때문에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나 어린아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添丁) 등을 강행하였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 주게 되어 있는 곡식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환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1862년에 일어난 농민 항쟁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흔히 ‘삼정(三政)의 난’이라고도 하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1862년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 농민 항쟁’이었다. 계속되는 농민 봉기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를 조사하게 하였고, 2월 29일 박규수를 진주 안핵사로 보내 난을 수습하게 하였다.

3개월에 걸쳐 농민 항쟁을 수습한 박규수는 5월 22일의 상소문에서 삼남(三南)에서 발생한 농민 항쟁의 원인을 ‘삼정이 모두 문란함(三政之俱紊)’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 중에서도 “환곡과 향곡(餉穀)이 으뜸입니다. ”라고 하여, 삼정 가운데 특히 환곡의 폐단을 우선으로 꼽았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세도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직 기강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정권을 뒷받침하는 지방 토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백성이 부담해야 되는 결세가 높아져 갔고, 이는 결국 농민 항쟁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농민 항쟁의 원인을 삼정 문란으로 파악한 박규수는 그 수습책을 ‘삼정이정(三政釐正)’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삼정 가운데 문란이 가장 심한 것은 환곡과 향곡이므로 환곡을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정을 바로잡기 위한 교지(敎旨)가 내려졌으며, 이어서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이 설치되었다. 삼정이정청은 1863년 윤8월 19일까지 지속되면서 농민 항쟁의 수습을 위한 방략을 강구하였고, 마침내 「삼정이정절목(三政釐正節目)」으로 완성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삼정문란과 명화적」,『역사비평』17,배향섭,역사문제연구소,1991.
저서
『1862년 진주농민항쟁』, 김준형, 지식산업사, 2001.
『조선후기 환곡제개혁연구』, 송찬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편저
「삼정의 문란」, 양진석,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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