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근대개항 후 생활 모습의 변화

덕수궁 석조전 건축

덕수궁에 서양식 석조 건물을 지었는데, 그 비용이 132,299원(元)이었다.

『매천야록』 권6, 융희 4년 경술

4일. 영국인 데이비슨(Davidson, H. W.)에게 주 대정식 은제 향로(周大鼎式銀製香爐) 1개와 금 500원을 증여하였다. 이는 덕수궁 내의 석조전 건축의 감독으로 다년간 경영했으므로 기념품을 내린 것이다.

순종실록』[부록] 권4, 6년 3월 4일(양력)

建洋製石屋于德壽宮, 費十三萬二千二百九十九元.

『梅泉野錄』 券6, 隆熙 4年 庚戌

四日. 贈與英國人에취불유데비손 周大鼎式銀製香爐一箇⋅金五百圓. 以德壽宮內石造殿建築監督多年經營爲記念品也.

『純宗實錄』[附錄] 卷4, 6年 3月 4日(陽曆)

이 사료는 서양식 근대 건축물인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의 건축과 관련한 기록이다.

서양식 근대 건축물의 축조는 처음 개항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궁궐, 서울 도성이 그 뒤를 이었다. 개항기에는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 창덕궁에 국왕이 거처했는데, 이 세 궁궐에는 모두 서양식 건축물이 건립되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덕수궁의 석조전은 황제의 권위를 드러낸 상징물로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석조전은 1900년 무렵에 계획되었는데, 언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1905년에는 2층이 거의 완공되어 1907년부터 영국 회사가 내부공사에 들어가 1909년에 준공된 뒤, 1910년에 황실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석조전은 총세무사(總稅務司) 브라운이 300만 원의 예산을 가지고 건립을 진행하였고, 한국인 기사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친, 일본인 등이 기초 공사 감독을 맡았다. 브라운이 해임된 뒤에는 1905년부터 데이비슨이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설계는 영국인 하딩이 맡았다. 이후 공사가 일본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석조전 건립의 주도권이 영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을 뜻한다. 총 면적은 400평[1,322.31㎡]이고, 높이가 7칸 반, 길이가 25칸으로 접견실, 침실, 거실, 담화실, 목욕실 등으로 구성되었다.

덕수궁 석조전은 외국 사절의 접견, 외국 귀빈의 숙소, 황실 행사, 황실의 생활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물을 건립하여 덕수궁을 왜곡 변형했다고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매우 단편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대한제국이 경운궁을 크게 짓고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다른 한편으로 양관을 짓고 서양식 원수복을 입고 서양 사람을 접견하는 일을 동시에 행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정책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해서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구본 신참(舊本新參)의 논리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데이비슨은 영국인으로서, 1901년 한국에 건너와 주로 세관 관리를 역임했다가 덕수궁 건축을 감독하고 탑골공원을 건축하였다. 1910년 국권 강탈 당시 그 공적에 따라 훈장을 받기도 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개화기 궁정건축가 사바찐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논문집』12-7,김태중,,1996.
「대한제국기의 국가 상징 제정과 경운궁」,『서울학연구』40,목수현,,2010.
「경운궁의 양관들: 돈덕전과 석조전을 중심으로」,『서울학연구』40,우동선,,2010.
저서
『덕수궁(경운궁)』, 김순일, 대원사, 1991.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 2004.
『덕수궁』, 안창모, 동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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