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근대동포들의 해외 이주

간도 지역으로의 이주

간도 상황. 북간도 관리(管理) 이범윤(李範允) 씨가 내부에 보고한 내용

삼가 국상의 반포를 듣고 이곳 백성들에게 상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지타소(芝他所)의 청국 관원 진작언(陳作彦)과 청국 통령(統領) 호전갑(胡殿甲)이 병사 400~500명을 풀어 한국 백성 30명을 묶어 가두고 몽둥이로 때리고 불로 지졌습니다. 또한 그들은 한인의 호적을 빼앗아 갔으며 재산까지도 약탈하였습니다. 그들은 트집을 잡으면서 “비록 한국 백성이라 말하지만 청국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니 어떻게 한국을 위해 상복을 입고 슬퍼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는 흰 갓을 쓴 자를 만나기만 하면 모두 그 갓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간도 백성 20명을 잡아 가두고는 강제로 머리를 깎아 석방하면서 나머지 간도 백성들도 이번 기회에 머리를 깎아 버리겠다고 하는 등 온갖 협박을 하여 민심이 흉흉합니다. 일찍이 머리를 강제로 깎는 것과 관련해서 앞으로 절대 거론하지 않겠다는 청국 공사의 조처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행패는 실로 비적의 무리와 같은 짓입니다. 또 우리가 우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세계 공법임에도 청국 관원은 서울 주재 청국 공사의 문서가 있어야 관리의 주재를 허가하여 상호 협의할 수 있다며 지금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외부에 공문을 보내어 청국 공사와 조목마다 판별하여 간도 백성들을 보호하기 바랍니다.

북간도 관리 이범윤 씨가 보고한 내용

본 관리는 간도에 주재하면서 우리 백성을 보호해 달라는 취지로 공문을 러시아 국경 사무관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관리소의 설치를 일찍이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듣지 못했다고 회답했습니다. 그리고 소[牛] 매매 상인인 이경화(李京化)가 간도를 왕래하다가 러시아 관리에게 잡혀 갇혔는데, 러시아 장교가 무산에서 종성으로 와서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한국 관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청국 도적이 횡행하는 이곳에 주재하려고 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백방으로 방해하였습니다. 지금 〈황성신문〉을 보니 러시아 공사가 우리 외부에 공문을 보내어, 본 관리가 러시아 관리에게 병사를 요청하였다고 했다 합니다. 하지만 본 관리는 러시아 관리와 서로 사이가 먼 처지인데 어찌 저들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 공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저들의 거짓 보고를 힐책하여 외국인이 가진 의구심을 없애 주기 바랍니다.

황성신문〉, 1904년 3월 3일

●間島情况 北間島管理李範允氏가內部에報告되伏承 國恤頒布와即使島民成服이더니芝他所淸員陳作彥과淸統領胡殿甲이派縱兵匪四五百名於各社야韓民三十名을縛囚고杖打火烙고搜奪戶籍며搶奪財產난所執言者난稱以雖曰韓民이나耕食淸地니何可爲韓國服哀乎아고民着白笠者난逢必裂破며且押囚島民十二人고勒薙放出曰餘外墾民도次第薙髮이라고喝脅百般에民情遑遑니盖勒薙一事난切勿擧論之意로已有淸使妥辦이거現行悖虐은實不法匪魁也고且我保我民은世界公法이어淸員이提出歧談曰有駐京淸公使文憑後에可許管理駐箚야互成妥好라야現此阻碍니卽爲移照外部야與淸公使로逐章核辦야以保島民케라엿더라

◉管理報明 北間島管理李範允氏의報告를據한則俄國廓米薩에게本管理가駐箚墾島야保護吾民之意로知照엿더니照覆曰管理設官은曾未聞於駐京俄公使라고李京化가以牛商으로來往墾島러나俄官이捉囚고俄士官이自茂山으로來到鍾城야揚言曰管理가有何氣力야欲駐胡匪之藪乎아고百般阻碍더니今見皇城新聞則俄使가照會外部曰管理가請兵於俄官이라엿스니盖本官이與俄相阻之地에豈有請彼保護之理乎아移照俄公使야此等誣報난詰卞야以破外人之疑라엿더라

〈皇城新聞〉, 1904年 3月 3日

이 사료는 1903년 북간도 관리로 파견된 이범윤(李範允, 1863~?)이 청국 관리들의 강압적인 귀화 정책과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 대하여 대한제국 한국 정부에 올린 보고서를 당시 언론이 보도한 것이다.

사료는 두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락은 먼저 1904년 1월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계비인 명헌 태후가 죽어 국상이 반포되었지만 간도에서 청국 관리의 강한 압박으로 상복조차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상황을 전해 준다. 청국 정부가 간도 이주 한인들에게 청국 복식과 문화를 강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단락은 러일 전쟁 발발 직전 간도 문제를 두고 청국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자 이범윤이 간도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당시 혼춘(琿春) 지역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측과 협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러일 전쟁 국면에 접어들자 러시아 측은 이범윤의 협조 요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인들의 간도 이주는 19세기 고종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1870년을 전후하여 함경도 지역에는 대기근이 들었고 부패한 관리들의 학정과 수탈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두만강 너머에는 많은 황무지가 있었고, 청국은 한인들을 이용해 간도 지역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한인들은 초기에는 봄에 건너가 움막을 만들어 농사를 짓다가 가을에는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러나 차츰 온 가족을 데리고 아예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이주 지역도 두만강에서 가까운 지역에 그치다가 조금씩 간도 내륙으로 깊숙이 퍼져 들어갔다. 이들 대부분은 농사를 지었고, 광산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간도 거주 한인들의 수는 거의 10만 명에 이르렀다.

1880년대 조선과 청국은 간도 영유권 문제를 협상했지만,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간도 영유권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한제국은 변경의 경찰관청인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하고 이범윤을 파견하여 호구를 조사해 한국 정부에 보고하게 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간도가 조선 왕조의 개창과 관련된 땅이며 옛날부터 조선 영토였음을 주장해 나갔다. 이범윤은 진위대 군사를 주둔시켜 줄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하거나 충의대를 파견하는 등 무력충돌을 불사하였다. 청국도 이에 맞서 연길청을 설치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켜 한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두 나라 간의 충돌은 간도 영유권 문제가 핵심이었지만, 동시에 간도 한인들에 대한 통치권 행사를 누가 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유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청국 지방관과 군인들은 간도 이주 한인들에 대해 강력한 귀화 정책을 폈다. 한인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청국 옷을 입도록 하였다. 옷과 머리 모양을 청국 식으로 강요하여 이곳이 청국 영토임을 드러내려는 조치였다. 또 간도 이주 한인들은 대부분 청국인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인으로 혹은 품팔이로 생활하였는데 지주에게 바치는 소작료 외에도 청국 관리들이 매긴 가옥, 말, 소, 돼지 등에 붙인 각종 이름 없는 세금을 내야 했다. 한인들은 청국 행정 기관에 수탈당할 뿐만 아니라 마적들에게도 피해를 입어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겼다. 이와 같은 청국의 귀화 정책과 부당한 세금 부과에 맞서 한인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아예 귀국하거나 대한제국 한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였고, 언론사에 직접 글을 보내 관심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 한국 정부에 의지해 해결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청국의 강력한 통제 정책과 외교 분쟁을 우려한 대한제국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로 간도 이주 한인들은 청국 지방관의 부당한 세금 부과와 마적들의 약탈에 그대로 맞서야 했다.

이처럼 간도 이주 한인들은 두만강을 넘어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간도 영유권 문제와 맞물려 청국의 통제가 강력한 한편, 대한제국의 공권력은 미치지 않는 가운데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러일 전쟁과 을사조약을 겪고 일본이 간도 문제에 개입하면서 이주 한인들의 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형성 연구」,,김춘선,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8.
저서
『근대 변경의 형성과 변경민의 삶』, 동북아역사재단 편, 동북아역사재단 출판부, 2009.
『간도영토의 운명-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중화주의의 틈새에서-』, 최장근, 백산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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