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근대동포들의 해외 이주

연해주 지역으로의 이주와 삶

토지가 없는 이 지역의 한인들에게는 법이 있으나 마나였으며, 그들의 생명은 그때그때의 고용주나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러시아인에게 달려 있었다. 토지가 없는 한인이 이해 당사자로 나서는 법률적 처리나 재판의 사례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없다. 공정한 입장에서 본다면 토지 없는 한인들은 ‘방랑하는 가축’과 같아서, 고용주만 바뀔 뿐 일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결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고, 한인들의 지나 온 실제적인 삶에 근거를 두고 신중하게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페소츠키(V. D. Pesotsky), 「아무르 지역의 한인 문제」, 1913

Безземельное корейское население края стоит вне закона и жизнь его регулируется усмотрением каждого русского, не говоря уже о случайных хозяевах и чинах полиции. Никаких юридических сделок, никаких судебных дел, где бы выступал заинтересованной стороной безземельный кореец, встречатъ или слышать о них не приходится. Безземельный кореец при безпристрастном взгляде на положение является «бродячим рабочим скотом» и его кочевания создают перемену хозяев, но сущности дела не меняют. Сказанное только что вовсе не фигуральное выражение, а строго продуманный вывод, основанный на знакомстве с действительностью текущей жизни.

В. Д. Песоцкий, 「Корейский Вопрос в Приамурье」, 1913

이 사료는 러시아 작가 페소츠키(V. D. Pesotsky)가 1911년 러시아 황실의 칙명에 따라 연해주 지역 한인을 조사한 다음 발표한 글이다. 그는 연해주 지역에서의 한인 거주에 대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함께 기술하였는데, 이때 이주 한인들이 러시아의 관리와 지주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던 실상을 자세히 그렸다.

17세기 중엽부터 극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러시아는 1860년 청국과 북경 조약을 맺어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이에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기근과 관리들의 수탈에 지친 조선의 농민들은 고종 초기인 1863년부터 두만강 연안의 기름진 농지를 찾아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초기에는 조선인 이주자들을 환영하여 식량을 제공해 주거나 개간을 허락하였다. 러시아인만으로는 광대한 지역을 개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주한 조선인들은 지신허(地新墟, 러시아명 Tizinkhe), 연추(煙秋, 러시아명 Yanchikhe) 등에 조선인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한인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이에 부담을 느낀 러시아는 가능한 한 한인의 이주를 금지하고, 이미 이주한 한인들을 조선 국경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정착시켰다.

그러는 동안 1884년 조러 수호 통상 조약과 1888년 조러 육로 통상 조약이 체결되어 한인들의 법적 지위가 확정되었다. 1905년 일제의 한국 침략 이후에는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많은 한인이 이주하는 등 한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10년에는 러시아 거주 한인의 수가 대략 10만 명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주 한인들은 대체로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사를 지었다. 1893년부터 한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이들에게 토지도 분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인들이 황무지를 개척해 농경지로 만들어 놓으면 한 지역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게 하고 다시 미개간지로 내몰아 새롭게 농토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한인들 가운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경우에는 토지를 분배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한인들은 러시아인들의 토지를 빌려 소작을 지었다. 러시아 지주들이 고려인 농부에게 소작료로 수확량의 50%를 거둬들이기도 하는 등 소작 조건이 매우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사일 외에 가축을 사육하거나 아편을 재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를 갖고 정착한 한인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광산, 부두, 산림 벌채, 철도, 운송 분야에서 노동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인들에 대한 당시 러시아 한국 정부의 기본 정책은 러시아인 우월주의를 앞세운 인종차별이었다. 1886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당국은 한인을 전염병의 근원으로 몰아 한인 296명을 일본 기선에 태워 원산으로 추방했다. 1902년에는 한인과 중국인 등 황인종이 러시아인 거주 지역에 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금광에서 러시아 광주는 한인에게 공급하는 생활필수품의 값을 시가의 배를 받았고 채굴한 금은 시가의 절반으로 사들였다. 상투를 자르지 않거나 세례를 안 받아도 벌금을 내게 했다.

애초부터 러시아인이 한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중적이었다. 한인의 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과 한인의 과도한 유입이 연해주 지역 안보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입장이 동시에 있었다. 특히 러일 전쟁 이후 연해주 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는 황인종이 세계를 위협한다는 ‘황화론(黃禍論)’에 입각해 한인을 경계했다. 그래서 1908년 이후 한인의 금광 조사 금지, 어장의 한인 고용 금지 및 일반인에 대한 관영 사업에 한인 인부 고용 금지 등의 제한 조치가 취해지면서 아무르와 연해주 금광에서 일하던 한인 7,000명이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후임으로 온 곤다티 총독은 한인 옹호론자였다. 그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인에게 러시아가 제2의 조국이 되었다면서 러시아 국적 취득을 신청한 한인 모두에게 국적을 부여했다. 한인의 우수한 노동력에 주목하고 한인 고용 비율을 크게 높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10년 망국 후 3만 명 이상의 고려인이 러시아로 귀화했다. 그 무렵 연해주 지역에 등록된 한인의 수는 6만 2,000명에 달했고, 매월 600∼700명이 이주해 왔다.

이 사료에서 보듯이 러시아 작가 페소츠키는 러시아인 관리와 지주들에게 경제적, 법률적으로 고통 받는 한인을 두고 “방랑하는 가축과 같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런 지적을 한 이면에는 한인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노동한 결과 정작 러시아인들이 게으름에 빠져 타락하게 되었다는 시선도 함께 들어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한인 정책 아래에서도 이주 한인들은 지역에 뿌리를 내려 정착해 갔고, 해외 독립 운동의 든든한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최봉준, 최재형 등과 같은 인물은 상업 활동으로 부유한 상인이 되어 의병 활동 자금을 내거나 신문을 발행하여 한인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연해주 이민사 연구(1853년-1945년)」,『국사관논총』11,고승제,,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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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5,이동언,,1991.
「한인 노령이주와 제정러시아의 대한인정책」,『태동고전연구』14,이상일,,1997.
「만주⋅노령의 동포사회(1860-1910)」,『한민족독립운동사』2,임계순,국사편찬위원회,1987.
저서
『한국과 러시아: 관계와 변화』, 권희영, 국학자료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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