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sanford B. Dole) 하와이 주지사에게 보낸 알렌
(Horace Allen)의 편지, 1902년
'알렌' 관련자료
지금까지 한국인이 이민 허가를 얻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허가 없이 이민하면 귀국하는데 문제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한국인들이 혹독한 기근을 겪으면서 이민이 한층 더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습니다. 한편 한국 정부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일 많은 양의 쌀을 들여와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이민에 대한 관리들의 태도를 호의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상국민이었던 중국인이 쫓겨난 지역에 자신의 백성들이 이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종 황제
자부심과 많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고종 황제' 관련자료
(중략)
한국인들은 참을성이 깊고 근면하며 유순한 인종입니다. 오랫동안 복종한 습성으로 인해 다루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보통 외국 교육을 받는 것에 민감하여 적지 않은 이들이 미국으로 귀화하였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도 성공하여 그들이 받은 미국 교육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중략)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 섬에 가게 되면 신이 보낸 한국인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이 노동자로서 거부감 없이 성실하게 봉사한다는 점이 증명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Horace Allen′s Letter to sanford B. Dole, Governor of Hawaii]」, 1902년 12월 10일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야 하고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 시간 30분이 고작 휴식 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 말로 루나(Linas)로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그는 매우 엄격했다. ……(중략)…… 그는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일을 일단 시작하면 허리를 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소나 말처럼 다루었다. 만약 그의 명령을 어기면 사정없이 뺨을 맞거나 채찍질을 당했다. 우리들은 해고될까 두려워 그의 학대에 대항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증명 카드로서 번호표를 줄곧 달고 있었고, 이름은 쓰지 않고 번호를 대신 썼다. 나는 막사에 살았다. 숙소는 사병들의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이었다. 한 칸에 미혼 남자 네 사람씩 기거했다. 이부자리는 한 사람당 담요 한 장뿐이었다. 가끔 나는 찌는 듯한 실내 더위로 전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밥은 조석으로 손수 지어 먹었다.
주일은 쉬었다. 그러나 아무런 오락 시설도 없어 노동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말 모임을 가지기도 하나, 더러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다. 때로 심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향수병에 걸려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당은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0센트였다. 한 달 월급은 16불이었고, 통역관은 30불이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생활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라철삼, 『아메리카의 한인들』, 코리안 라이프, 2011
하와이에 있는 동포의 상황은 조선 내지 또는 미주 이외 외지에 있는 형제들이 항상 얻어 듣고자 하는 바이며, 또한 이번 하와이 동포 중 일부의 고국 방문 소식이 전해지므로 일반인들은 더욱더 그곳의 사정을 알고 싶어 한다. 우리 역시 그곳 사정을 상세히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나 먼저 작년 기준으로 조사한 일부를 공개하여 독자가 참고하도록 제공한다.
1. 인구
하와이에 있는 우리 동포가 바다를 건넌 것은 1904년 이민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그 해에 이주한 동포수가 2,435명이었고, 그 후 만 5년간 그 수가 거의 배에 달하였으니, 1920년도에 시행한 미국의 국세(國勢) 조사에 따르면 그 수가 4,950명이었으며, 재작년도, 즉 1921년 6월 말에 이르러서는 5,327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런데 동년도 중의 조사에 따르면, 출생자 수가 219명으로 출생률은 41.11이고 사망자 수가 87명으로 10명당 사망률이 16.33인데, 이를 그곳에 거주하는 다른 민족과 비교하면 비교적 높은 비율이나 반면에 사망률이 가장 높은 것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매우 유감이다. 그러나 근년에는 사진결혼으로 인하여 도미 부녀자의 수는 현저히 증가하였다.
2. 처자 초빙
하와이는 특히 사진 결혼과 부녀 초빙 금지령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재류 동포도 역시 자유로이 본국에 부처(婦妻) 초빙의 편의를 갖게 되었으니 근래 총영사관에 이들 관계 증명서 발급 신청서 제출 수가 격증하였다. 그곳 이민국장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작년 6월 말까지 과거 1년간 초빙 또는 다시 배를 타고 하와이를 건넌 동포 수가 101명이고, 다시 1918년부터 이후 4년간 발급한 초빙 증명 건수와 종류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중략)……
위 표 중에서 혼인한 처의 약 85%가 사진결혼이었고, 이 초빙된 부인의 연령은 그 남편과 크게 차이가 나서 20세 혹은 30세의 차이까지 있었으니, 10여 년 전만 해도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적은 것이 일반적 풍습임을 생각하면 정말로 엄청난 변화이다.
초빙 부녀의 원적지는 제법 각 도에 퍼져있어, 1918년에서 1921년까지 4개 년간 초빙된 197명 가운데 148명은 경상남도에서 건너 왔고 그 원적지 별로 적으면 아래와 같다.
경상남도 148명, 경기도 19명, 경상북도 9명, 강원도 8명, 평안남도 6명, 함경남도 3명, 황해도 2명, 충청남도 1명, 전라남도 1명, 계 197명
『개벽』 제36호, 1923년 6월 1일, 「‘하와이’에 사는 6,000 동포의 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