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근대동포들의 해외 이주

미국으로 이주하는 동포들

돌(sanford B. Dole) 하와이 주지사에게 보낸 알렌(Horace Allen)의 편지, 1902년

지금까지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려는 허가를 얻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허가 없이 이민하면 귀국하는데 문제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의 혹독한 기근을 겪고 난 뒤 이들에게 이민은 한층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 한국 정부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 많은 양의 쌀을 들여와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관리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중국인이 쫓겨난 곳으로 자기 나라 백성들이 간다는 것을 아는 고종 황제의 긍지가 이에 많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중략)

조선인들은 참을성이 많고 근면하고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으로 다루기 쉽습니다. 그들은 보통 외국 교육을 받는 데 대해 예민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미국으로 귀화하였고, 그런 가운데 귀국한 이들은 잘 되었으며 그것은 미국 교육의 덕이었습니다.

(중략)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곳에 가게 되면 신이 보낸 한국인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이 별 탈이 없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일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속의 한국인」 1882-1974, 김흥찬⋅웨인 패터슨, 1974.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야 하고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 시간 30분이 고작 휴식 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 말로 루나(Linas)로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그는 매우 엄격했다. ……(중략)…… 그는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일을 일단 시작하면 허리를 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소나 말처럼 다루었다. 만약 그의 명령을 어기면 사정없이 뺨을 맞거나 채찍질을 당하였다. 우리들은 해고될까 두려워 그의 학대에 대항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증명 카드로서 번호표를 줄곧 달고 있었고, 이름은 쓰지 않고 번호를 대신 썼다. 나는 막사에 살았다. 숙소는 사병들의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이었다. 한 칸에 미혼 남자 네 사람씩 기거했다. 이부자리는 한 사람당 담요 한 장뿐이었다. 가끔 나는 찌는 듯한 실내 더위로 전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밥은 조석으로 손수 지어 먹었다.

주일은 쉬었다. 그러나 아무런 오락 시설도 없어 노동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말 모임을 가지기도 하나, 더러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다. 때로 심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향수병에 걸려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당은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0센트였다. 한 달 월급은 16불이었고, 통역관은 30불이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생활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이홍기, 『하와이 농장 생활 체험기』

하와이에 있는 동포의 상황은 조선 내지 또는 미주 이외 외지에 있는 형제들이 항상 얻어 듣고자 하는 바이며, 또한 이번 하와이 동포 중 일단의 고국 방문 소식이 전하므로 일반에서는 더욱더 그곳의 사정을 알고 싶어 한다. 우리 역시 그곳 사정을 상세히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나 먼저 작년 기준으로 조사한 일부를 공개하여 독자의 참고에 제공한다.

1. 인구

하와이에 있는 우리 동포가 바다를 건넌 것은 1904년 이민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그 해에 이주한 동포수가 2,435명이었고, 그 후 만 5년간 그 수가 거의 배에 달하였으니, 1920년도에 시행한 미국의 국세(國勢) 조사에 따르면 그 수가 4,950명이었으며, 재작년도, 즉 1921년 6월 말에 이르러서는 5,327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런데 동년도 중의 조사에 따르면, 출생자 수가 219명으로 출생률은 41.11이고 사망자 수가 87명으로 10명당 사망률이 16.33인데, 이를 그곳에 거주하는 다른 민족과 비교하면 비교적 높은 비율이나 반면에 사망률이 가장 높은 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러나 근년에는 사진 결혼으로 인하여 도미 부녀자의 수는 현저히 증가하였다.

2. 처자 초빙

하와이는 특히 사진 결혼과 부녀 초빙 금지령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재류 동포도 역시 자유로이 본국에 부처(婦妻) 초빙의 편의를 갖게 되었으니 근래 총영사관에 이들 관계 증명서 발급 신청서 제출 수가 격증하였다. 그곳 이민국장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작년 6월 말까지 과거 1년간 초빙 또는 다시 배를 타고 하와이를 건넌 동포 수가 101명이고, 다시 1918년부터 이후 4년간 발급한 초빙 증명 건수와 종별을 들면 아래와 같다. ……(중략)……

위 표 중에서 혼인한 처의 약 85%가 사진 결혼이었는데, 이 초빙된 부인의 연령은 그 남편과 몹시 차이가 있어 20세 혹은 30세의 차이까지 있었으니, 10여 년 전만 해도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적은 것이 일반적 풍습임을 생각하면 급변이라고 할 수 있다.

초빙 부녀의 원적지는 각 도에 자못 걸쳐 있어, 1918에서 1921년까지 4개 년간 초빙해 혼인한 197명 가운데 148명은 경상남도에서 건너 왔고 그 원적지 별로 적으면 아래와 같다.

경상남도 148명, 경기도 19명, 경상북도 9명, 강원도 8명, 평안남도 6명, 함경남도 3명, 황해도 2명, 충청남도 1명, 전라남도 1명, 계 197명

개벽』 제36호(1923.6.1) ‘하와이’에 사는 6,000 동포의 실황

Horace Allen′s Letter to sanford B. Dole, Governor of Hawaii 1902

(중략) Heretofore it has been somewhat difficult for Koreans to get permission to leave their country, without which permission emigration would be attended with trouble on returning to their native land. The severe famine of the past winter made the matter seem all the more attractive to the people, while the fact that the Government had to import large quantities of rice to feed the starving seems to have turned the attention of the officials favorably to the subject of emigration. It is probable however that the pride of the Emperor in learning that his people might go where the great Chinese are excluded, had much to do with the matter.

(중략)

The Koreans are patient, hard-working, docile race; easy to control from their long habit of obedience. They are usually very keen on getting a foreign education, and this has taken quite a number to the United States where a few have become naturalized, while those who have returned are doing well and are a credit to their American education.

(중략)

If Koreans do get to the Islands in any numbers it will be a Godsend to them (Koreans) and I imagine they will be found to be unobjectionable and of good service as laborers.

Hyung-chan Kim and Wayne Patterson, 1974 (The) Koreans in America, 1882-1974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야 하고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시간 30분이 고작 휴식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 말로 루나(Linas)로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그는 매우 엄격했다. ……(中略)…… 그는 우리가 담배 피우는 것이나 일을 일단 시작하면 허리를 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소나 말처럼 다루었다. 만약 그의 명령을 어기면 사정없이 뺨을 맞거나 채찍질을 당하였다. 우리들은 해고될까 두려워 그의 학대에 대항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증명 카드로서 번호표를 줄곧 달고 있었고, 이름은 쓰지 않고 번호를 대신 썼다. 나는 막사에 살았다. 숙소는 사병들의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이었다. 한 칸에 미혼 남자 네 사람씩 기거했다. 이부자리는 한 사람 당 담요 한 장뿐이었다. 가끔 나는 찌는 듯한 실내 온도로 전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밥은 조석으로 손수 지어먹었다.

주일은 쉬었다. 그러나 아무런 오락시설도 없어 노동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말 모임을 가지기도 하나, 더러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다. 때로 심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향수병에 걸려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당은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0센트였다. 한 달 월급은 16불이었고, 통역관은 30불이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생활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이홍기, 『하와이 농장 생활 체험기』

「하와이」에 잇는 同胞의 狀況은 朝鮮 內地 또는 米洲 以外에 外地에 잇는 兄弟의 恒時 得聞코져 하는 바이며 尙又 今回 「하와이」同胞中 一團의 故國 訪問의 消息이 傳하매 一般은 더욱이나 그곳의 事情을 알고 십허 한다. 우리 亦是 그곳의 事情을 詳知치 못함을 遺憾으로 생각하나 먼져 昨年 現在에 依한 調査의 一部를 公開하야 讀者의 叅考에 供한다.

一. 人口

布哇에 在留하는 我同胞의 渡洋은 1904年 移民時로 爲始하야 該年에 移住한 同胞數가 2,435人이엿고 其 後 滿 5個年間에는 其 數가 殆히 倍에 達하엿나니 1920年度에 行한 米國의 國勢 調査에 依하면 其 數가 4,950人이엿스며 再昨年度 卽 1921年 6月末에 至하야는 5,327人으로 推算케 되엿섯다. 그런데 同 年度中의 調査에 依하면 出生數가 219人이니 此 出生率은 41.11이오 死亡數가 87人이니 每 10人에 對한 死亡率은 16.33인대 此를 該地에 住居하는 他族에 比하면 比較的 高率이나 其 反面에 死亡率이 最高됨을 不免함이 一大遺憾히다. 그러나 近年에는 寫眞結婚으로 因하야 渡米婦女數는 顯著히 增加한다.

二. 妻子招娉

布哇는 特히 寫眞結婚 及 婦女招娉 禁止令에 除外되얏슴으로 在留同胞도 亦是 自由로 本國에 婦妻招娉의 便宜를 有케 되얏나니 近來 總領事舘에 此等의 關係 證明書下付願提出數가 激增하야 常地 移民局長의 發表한 바에 依하건대 昨年 6月末까지의 過去 1個年間에 招娉 又는 再航渡布한 同胞數가 101名이고 다시 1918年부터의 以後 過去 4個年間에 發給한 招娉證明의 件數와 種別을 擧하면 左와 如하다. (표 생략)

右表中 娉妻의 約 8割 5分은 寫眞結婚으로 되엿는데 이 招娉된 婦人의 年齡은 其 男便과 甚히 差違되야 20 或 30의 差違까지 잇섯나니 10餘年 前만 하여도 男子가 女子보다 年少됨이 常例이든 風紀를 回顧하면 可謂 急變이라고 하엿다.

招娉婦女의 原籍地는 자못 各道에 亙하야 1918年 乃至 1921年 過去 4個年間의 招娉數 197名中 148名은 慶尙南道에서 渡來하엿고 其 原籍別을 揭하면 如左하다.

慶尙南道 148名 京畿道 19名 慶尙北道 9名 江原道 8名 平安南道 6名 咸鏡南道 3名 黃海道 2名 忠淸南道 1名 全羅南道 1名 計 197名

『開闢』 第36號(1923. 6. 1) 「하와이」에 사는 六千同胞의 實況

이 사료는 1902년부터 시작된 한인의 하와이 이주와 관련해서 한인 이민을 추진하게 된 배경과 이민의 추이, 그리고 ‘사진 결혼’ 등 미국 이민 사회의 실상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1901년 주한 미국 공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 이사인 어윈(William G. Irwin)으로부터 하와이에 한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 이후 알렌은 하와이에 들러 한국 이민의 추진을 합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인 1902년 봄 이민 모집책으로 미국인 사업가 데슐러(David W. Deshler)를 선정하고 고종에게 한인 이민 문제를 거론하여 한국 정부를 중개하였다. 첫 번째 사료와 같이 알렌은 하와이 총독 돌(Sanford B. Dole)에게 편지하여 조선은 기근 때문에 양곡을 수입하는 형편이고, 따라서 이민에 대한 한국 정부 관리들의 여론이 긍정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알렌은 조선인들의 습성을 거론하며, 하와이의 농장에 ‘훌륭히 봉사할 수 있는 노동자들’임을 강조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1901년 가뭄과 홍수로 인한 신축년 대흉년과 콜레라 등의 전염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미곡을 수입하고 혜민원을 설치하여 기근 구제에 나섰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또 일본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도 고려하였다. 한편, 하와이에서는 설탕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초기엔 중국인 노동자들이, 1885년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본격 유입되어, 1902년에 이르면 이들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노동 인구의 73%를 상회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도시로 떠나 버렸다. 또한 중국인의 신규 입국이 금지되어 노동력이 부족하였고 일본인의 경우 근로 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동맹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농장주들은 이들을 대체하기 위한 노동력으로 한인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1902년 11월 데슐러는 이민 사업에 관한 독점권을 허가받았고, 고종 황제의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어 궁내부수민원(綏民院)이 설치되고 민영환이 그 총재로 임명되었다. 데슐러는 이민 모집을 위해 ‘동서 개발 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인천 내리에 설립하고 신문에 이민자 모집 광고를 게재하였으며, 몇몇 항구 도시에도 같은 내용의 광고문을 게시하였다. 대한제국 한국 정부도 공고문을 게시하였으나 이민자는 좀처럼 모집되지 않았다. 이때 알렌의 부탁을 받은 인천 내리 감리 교회 교사 존스(George Harber Jones)가 하와이의 좋은 기후, 자녀 교육의 기회, 높은 임금 등을 강조하며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 결과 교회 교인 50명과 인천항 부두 노동자 20명이 이민을 신청하였으며, 그 외 각지에서 50여 명이 신청했다. 최종 121명의 이민단은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이듬해 1월 12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신체 검사를 받은 일부는 입국이 거부되기도 하여 1차 이민단은 모두 102명이 되었다. 이후 이들은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인 이민자들은 하와이 15개 농장에 골고루 배치되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모집 때의 선전 문구처럼 달콤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작업은 자연 상태의 잡목들을 자르고 정리 작업을 하여 농토가 조성되면 거기에 관개 시설을 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이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농장 감독의 채찍을 맞아 가며 하루 10시간 노동을 하는 대가로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0센트의 품삯을 받았다. 한달 25일 꼬박 작업해야 16~18달러를 벌 수 있었다. 한인들은 군인 막사와 같은 농막 생활을 했다. 이 같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뿐만 아니라 선불로 받은 이민 경비 170달러를 3년간 상환해야 하는 일종의 노예 계약이 한인들을 괴롭혔다. 당시 한인들의 농장 생활상은 두 세 번째 사료인 하와이 이민 1세대의 농장 생활 경험기에 잘 나타나 있다.

1903부터 1905년 8월까지 64회의 배편으로 7,375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가족 이민이 500가족 1,478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독신자 이민이었다. 남자가 6,714명이고 여자가 659명으로 성비는 10 : 1 정도로 불균형했다. 남자 기혼자는 2,857명으로 478명만 부인이나 가족을 동반했다. 연령대는 20~30대가 가장 많았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가장 많고 경기도, 경상도 순이었다.

1905년에만 2,274명이 이민할 정도로 절정에 이르렀던 하와이의 한인 이민은 1905년 4월 ‘해외 이민 금지령’이 공포되면서 중단되었다. 이는 멕시코로 이민 간 한인 노동자들이 가혹한 처우를 받고 있다며 전개된 이민 반대 운동과 반일 운동의 근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일본 측의 우려가 작용한 결과였다. 여기에 하와이 노동 시장에 독점적으로 일본인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일본 이민 단체가 본국에 항의하면서 이민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10년까지는 교육을 목적으로 한 학생들의 이주만이 허용되었다.

국권을 빼앗긴 후인 1912년 일본 정부는 1903~1905년에 이민한 남성 노동자들을 위해 여성 이민이나 가족 초청 이민만을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1910~1924년 기간에 600명 내지 1,000여 명의 여성이 혼인을 목적으로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이때 서로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사진 결혼’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진 결혼의 성행은 한인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왔다. 즉 한국에서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300~500달러의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농장 일에 종사해야 했다. 이로 인해 하와이 농장은 안정적으로 한인들의 노동력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상황이 달라져 플랜테이션 농장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도시로 2차 이주를 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1910년 미국 인구 조사에 의하면,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인 수는 4,533명이며, 그 가운데 농장 노동자는 1,787명이었다. 한인의 60%가 농장을 떠나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에 전체 한인 4,950명의 27%인 1,300여 명이 호놀룰루를 주거지로 삼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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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하와이이민」,『국사관논총』9,최창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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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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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이민과 인천』,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편, , 2004.
『아메리카로 가는 길: 한인 하와이 이민사, 1896-1910』, 패터슨, 들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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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주 한인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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