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근대일제 하의 사회 운동

암태도 소작 쟁의 확대

400명 억류 감시

소작회 간부 방면 운동으로 소작인 400여 명이 야단 중

암태도 소작 쟁의 확대?

오랫동안 문제 중이었던 전남 무안군의 암태소작회(岩泰小作會) 간부 13명은 현재 광주 지방 법원 목포 지청에서 예심 중으로 목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이 소작회의 회원 400명이 목포에 수감되어 있는 간부들의 방면 운동을 하고 있는데 만일 방면되지 않으면 이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계속 운동을 할 결심이라고 한다. 목포에 온 소작회원 400명은 지금 목포 경비소에 억류되어 경관이 감시하는 중이다. 계속하여 면민(面民)들도 이 사건에 대해 수감된 소작 간부의 방면 운동을 할 것이라는데 이 사건은 문재철(文在哲)과의 소작료 쟁의(爭議) 관계로 생긴 일이다.(목포지국특전)

〈동아일보〉, 1924년 6월 6일

四百名 抑留監視

소작회 간부 방면 운동으로 소작인 사백여 명이 야단 중

岩泰小作爭議 擴大?

오랫동안 문뎨중이든 전남무안군(全南務安郡) 암태소작회(岩泰小作會) 간부 십삼인은 지금 광주디방법원 목포지텽(光州地方法院木浦支廳)에서 예심 중(豫審中)임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여잇는 바 전긔 소작회원 사백명이 목포에 수감되여잇는 간부들의 방면운동을 하는데 만일 되지아니하면 이 사건이 해결되기지는 계속 운동을 할 결심이요 목포에 온 소작회원 사백명은 지금 목포경비소에 억류되고 경관이 감시하는 중이요 계속하야 면민도 이 사건에 대하야 수감된 소작간부의 방면운동을 할 터이라는데 이 사건은 문재철(文在哲)에게 관한 소작료(小作料)의 쟁의(爭議) 관계로 생긴 일이라더라(목포지국특뎐)

〈東亞日報〉, 1924年 6月 6日

이 사료는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벌인 ‘암태도 소작 쟁의’를 알리는 〈동아일보〉 1924년 6월 6일자 신문 기사 일부이다.

암태도 소작 쟁의는 암태도의 소작인이 암태도소작회(岩泰島小作會)를 조직해, 약 1년간에 걸쳐 암태도 지주 문재철(文在喆, 1883~1955)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한 소작 쟁의이다.

문재철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 수탈 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지 지주였다. 1920년대에는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와 전라북도 고창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암태도에는 1923년 쟁의 발발 당시 약 140정보(논 98정보, 밭 42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 소유지를 마름에게 감독하게 하여 경영하였다.

1910년대까지 지주들은 보통 지세(地稅)와 제 경비를 공동 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 정책(低米價政策)으로 지주의 수익이 감소하자 지주 측에서는 소작료를 올림으로써 손실분을 보충하려 하였다. 그 중에서도 문재철의 경우가 심해, 반분타조제를 4⋅6타조제(소작인 4할, 지주 6할)를 적용해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이에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암태도소작회를 조직하고, 창립총회에서 소작료를 논 4할, 밭 3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소작인회의 이와 같은 결의는 1922년의 진주 소작 노동자 대회, 순천 소작 쟁의에서 결의한 내용과 유사하였다. 특히 순천 소작 쟁의에서 소작료 4할을 결의하여 이를 관철시켰는데, 암태도소작회는 이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작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당시 암태도에 토지를 갖고 있던 지주 나카지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천후빈(千后彬) 등은 대체로 이를 수용했으나 암태도 최대 지주였던 문재철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 목포경찰서가 일본 경찰들을 출동시켜 소작인들을 위협하자, 소작회는 문재철에 대한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 동맹을 시작하였다. 이후 소작회 측은 3월 27일 면민 대회를 열어 소작인의 요구를 재차 주장하는 한편 5월 15일까지 요구에 불응할 때에는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자 지주 측에서는 면민 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소작인들을 습격하고, 면민 대회의 결의를 묵살하였다. 이에 소작회는 1924년 4월 15일에 열리는 전조선 노농 대회에 대표를 파견해 소작 문제를 호소하기로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소작인들은 그 해 4월 22일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는 지주 측 청년들과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50여 명의 소작인이 일본 경찰에 잡혀 갔다. 이렇듯 사태가 악화되자, 그 동안 뒤에서 쟁의를 이끌던 암태청년회 회장 박복영(朴福永, 1890~1973)이 앞장서서 쟁의를 주도하였다. 여기에 암태부인회(岩泰婦人會)도 참여하면서 암태도 소작 쟁의는 소작인만의 일로 국한하지 않고 암태도 전 주민의 일로 발전하였다. 6월 2일에는 재차 면민 대회를 개최해 목포로 나가 항쟁할 것을 결의하고, 400여 명의 소작인이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 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시위 농성을 벌였다. 본 사료는 이때의 일을 보도한 것이다. 이후 7월 8일부터는 600명이 다시 법원으로 몰려가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고 단식투쟁을 전개했으며, 7월 11일에는 지주 문재철의 집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다가 26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암태도 소작 농민 항쟁 소인식은 각계 각층의 여론을 일으켜 서울⋅광주⋅목포 등지의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 변론을 자청하고, 서울⋅평양 등지에서는 지원 강연회와 지원금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또, 목포에서는 시민대회가 계획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암태도 소작 쟁의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자, 일제는 쟁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8월 30일 목포경찰서 서장실에서 일제 관헌 측을 대표하여 전라남도 경찰국 고등과장의 중재로,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을 대표한 박복영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타협을 보게 되었다.

(1) 지주 문재철과 소작회 간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회에 일금 2000원을 기부한다. (2) 1923년의 미납 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 상환한다. (3) 구금 중인 쌍방의 인사에 대해서는 9월 1일 공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한다. (4) 도괴된 비석은 소작회의 부담으로 복구한다.

이렇게 4개 조항이 약정되어 1년간에 걸친 쟁의는 소작인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암태도 소작 쟁의의 영향은 전국으로, 또는 전라남도 지방, 특히 서해안 도서 지방의 소작 쟁의를 자극하여 1925년 도초도(都草島) 소작 쟁의, 1926년 자은도(慈恩島) 소작 쟁의, 1927년 지도(智島) 소작 쟁의에 영향을 주었다. 암태도 소작 쟁의는 지역 사회의 강한 단결과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반향을 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 식민 시기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 알려져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일제하 소작쟁의의 전개와 문학적 형상화에 관한 고찰 -암태도 소작쟁의를 중심으로-」,『어문논집』65,이도연,민족어문학회,2012.
「식민지시기 소작쟁의와 농업정책의 변화」,『사회발전연구』6,전희진,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2000.
「암태도소작쟁의 주역의 세 가지 길-서태석⋅박복영⋅문재철-」,『한국민족운동사연구』51,정병준,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2007.
「일제하 소작쟁의운동의 전개와 본질에 관한 연구」,『경제논집』30,주봉규,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1991.
저서
『암태도 소작 쟁의』, 박순동, 청년사, 1980.
편저
『식민지시대 농업불황과 소작쟁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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