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근대일제 하의 사회 운동

형평 운동 취지문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근본 강령이다. 그런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며,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본사의 큰 뜻이다.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어떠한 압박을 받아 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하여도 피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여기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유도 없이 일전의 압박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문제를 선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급무이다. 비천하고 가난하고 열악하고 약하여 굴종한 자는 누구였던가? 아아 그것은 우리의 백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러한 비극에 대한 이 사회의 태도는 어떠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는 압박과 멸시만 하였다.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금수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우리 백정밖에 없다.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의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이천만의 일원이라. 애정으로써 상호부조하며 생명의 안정을 도모하고 공동의 번영을 도모하려 한다. 이에 40여 만의 단결로써 본사(本社)의 목적을 선명하게 표방하고자 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23년 4월 30일

公平은 社會의 根本이요 愛情은 人類의 本令이라. 然함으로 我等은 階級을 打破하며 侮辱的 稱號를 廢止하며 敎育을 獎勵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期함이 本社의 主旨이라 今我 朝鮮의 우리 白丁은 如何한 地位와 如何한 壓迫에 處하엿는가? 過去를 回想하면 終日 痛哭에 血淚를 難禁할 바라. 이에 地位와 條件問題 등을 提起할 餘裕도 업시 日前의 壓迫을 絶叫함이 우리의 實情이요 이 問題를 先決함이 우리의 急務로 設定하는 것은 的確한지라. 卑하며 貧하며 劣하며 弱하며 賤하며 屈하는 자 누구인가? 噫라 우리白丁이 아인가? 그런데 如此한 悲劇에 對한 이 社會의 態度는 如何한가? 所謂 知識階級에서 壓迫과 蔑視만 하엿도다. 이 社會에서 우리 白丁의 沿革을 아는가? 모르는가. 決코 賤待를 밧을 우리가 안일지라 職業의 別이 잇다 하면 禽獸의 목숨을 빼앗는 자 우리의 白丁뿐이 아니인가 하노라. 本社는 時代의 要求보다도 社會의 實情에 應하여 創立되앗슬 뿐 아니라 우리도 朝鮮民族二千萬의 一人이라. 愛情으로써 相互扶助하야 生命의 安定을 圖하며 共同의 存榮을 期코자 玆에 四十餘萬의 團結하야 本社의 目的인 그 主旨를 宣明히 標榜코자 하노라.

〈朝鮮日報〉, 1923年 4月 30日

이 사료는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 차별에 분개한 신현수(申鉉壽, 1893~1961, 양반)⋅강상호(姜相鎬, 1882~1957, 양반)⋅천석구(千錫九, 양반)⋅장지필(張志弼, 1898~?, 백정) 등과 회원 80여 명이 창립한 형평사의 취지서이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법제상으로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존속하였다. 형평사 창립 당시 백정의 수효는 40여만 명으로 대부분 도살업, 가죽 가공업, 대나무 및 버드나무 가공업 등에 종사하였다. 백정들은 일반인에 의한 차별과 박해가 심했다. 공무원 및 교원들이 차별 대우할 뿐만 아니라, 목욕탕⋅이발소⋅요리점 등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차별이 행해졌다. 이러한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형평사가 조직된 것이다.

창립총회에서는 취지서와 함께 ‘사칙(社則)’을 채택하고 간부를 선출하여 조직을 갖추었다. 취지서에서는 백정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모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원칙은 백정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사칙’은 계급 타파, 모욕적 호칭 폐지, 교육 장려, 상호 친목 등 19개 조로 이뤄져 있다.

형평사 창립 후 형평 운동은 급격히 확대되어 각 도에 지사⋅분사가 설립되고 11월 7일 대전에서 형평사 전국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이렇게 백정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한 운동이 활성화된 이유는 일제 강점기 백정들의 경제적 소득이 상당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력은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신분적으로 여전히 천대받던 상황에서 백정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집단을 상호 보호하는 한편 자식들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취학률이 5% 남짓하던 시절 상당수의 백정이 자녀들을 취학시켰다. 이러한 백정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 사회의 정상적 구성원으로 대접받고 싶은 욕구,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력은 형평사 운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진주 지역에서 형평사의 운동은 사회의 인습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닥쳐야 했다. 진주 농민 2000여 명은 형평사 해산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푸줏간을 공격하고 고기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방해도 일어났다. 백정과의 동석 예배를 거부하는 교회들도 있었으며, 백정들의 기부금으로 신축한 학교의 교장이 백정 자녀들의 입학을 거부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이러한 조선 내에서 형평사를 둘러싼 모든 논쟁에 대해 조선 총독부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신분제 철폐는 일제가 주장했던 문명 개화의 주된 요소였지만, 1920년대 중반 조선에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농민⋅노동자 등 무산 계급의 조직화가 다방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정이라는 대표적인 소외 계층의 조직화는 조선총독부 입장에서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애초에 일본도 메이지 유신 때 신분 차별이 제도적으로 철폐되었지만 관습적으로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데다 오히려 조선보다 차별의 정도가 더 컸기에, 조선 총독부로서는 백정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제3세계 근대화 과정에서 강조되는 ‘인권’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개인의 권리 자체를 보장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나 민족 등 집단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었다는 세계사적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형평사는 1924년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기관지 『형평』의 발간과 피혁 공장 설립 등을 결의하고, 당시의 진보적인 사회운동 단체와 제휴하여 반일 노선인 무산운동(無産運動)에도 참여했다. 이후 각종 파업⋅소작 쟁의 등에 진출해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 연대하여 활동했으며, 고려혁명당 사건에는 장지필 등 간부가 연좌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형평사는 노선을 둘러싸고 급진파⋅온건파의 대립을 겪어야 했다. 애초에 형평사의 양대 구성원이었던 개명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과 실제 차별을 받았던 백정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형평사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1930년대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으로 해체된 뒤 친일 단체로 재결성되면서 본래의 의의를 상실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일제하의 형평사운동 1923 ∼ 1935 :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을 중심으로」,,강정태,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1.
「1920년대 조선과 일본의 신분해방운동-형평사와 수평사를 중심으로-」,『일본근대학연구』23,박세경,한국일본근대학회,2009.
「형평사 운동의 역사적 평가」,,이나영,동의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5.
저서
『형평운동』(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2), 고숙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일제 강점기 형평운동의 지역적 전개』, 김재영,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형평 운동 연구 : 일제 침략기 백정의 사회사』, 김중섭, 민영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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