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현대광복 직후 사회 운동

대한 독립 촉성 노동 총연맹 결성 선언문 및 강령

200만의 노동전선을 통일

대한독립노동총연맹 결성

남조선에 있는 공장종업원 약 2백만 명으로 구성된 대한독립노동총연맹(大韓獨立勞働總聯盟)이 요즈음 시내 시천교대강당에서 김구(金九) 총리, 안재홍(安在鴻),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이번에 결성된 노동총연맹의 취지는 즉 현재의 조선노동운동은 지도자의 비민족적 정신이 부식되어 갈 뿐 아니라 정치적 색채가 농후함을 지적하여 진정한 국제노선에 입각한 한국민족으로서 독자적 입장에서 자본가의 착취를 배격하고 완전한 민주주의 원칙 하에서 노동자의 해방과 복리를 위하여 투쟁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위 연맹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령을 선포하여 전 연맹원의 결의를 대변하였다.

강령

▲ 우리는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의 원칙으로 건국을 기함.

▲ 우리는 완전독립을 기하고자 자유노동과 총력을 발휘함으로써 건국에 헌신함.

▲ 우리는 심신을 연마하여 진실한 노동자로서 국제수준으로 질적 향상을 도모함.

▲ 우리는 피와 땀을 아끼지 않고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친선을 기함.

▲ 우리는 전국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함.

〈동아일보〉, 1946년 4월 8일

二百萬의 勞働戰線을 統一

大韓獨立勞働總聯盟 結成

남조선에 있는 공장종업원 약 二백만명으로 구성된 대한독립노동총련맹(大韓獨立勞働總聯盟)이 요지음 시내 시천교대강당에서 김구(金九)총리, 안재홍(安在鴻),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 제씨 림석하에 결성되였다. 이번에 결성된 노동총련맹의 취지는 즉 현재의 조선노동운동은 지도자의 비민족적 정신이 부식되여갈뿐아니라 정치적색채가 농후함을 지적하야 진정한 국제노선에 립각한 한국민족으로써 독자적립장에서 자본가의 착취를 배격하고 완전한 민주주의 원측하에서 노동자의해방과 복리를 위하야투쟁할것이라한다.

그런데 동련맹에서는 다음과같은강령을선포하야전련맹원의 결의를대변하였다.

綱領

▲ 우리는民主主義와 新民族主義의原則으로建國을期함

▲ 우리는完全獨立을期코저 自由勞働과 總力發揮로써 建國에獻身함

▲ 우리는心身을練磨하야眞實한 勞働者로써 國際水準에 質的向上을 圖謀함

▲ 우리는血汗不惜으로 勞資間親善을期함

▲ 우리는全國勞働戰線의 統一을期함

〈東亞日報〉, 1946年 4月 8日

이 사료는 1946년 3월 10일 결성된 우익계 노동조합인 대한 독립 촉성 노동 총연맹(이하 대한 노총)의 결성을 보도하는 일간지 기사로서 연맹의 강령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1945년 11월 5일부터 이틀 동안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이하 전평) 결성 대회’가 515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945년 9월 26일 노동자들이 1920년대부터 전개해 왔던 대중 조직과 산업별 노조 활동을 바탕으로 전평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마침내 산업별 조직에 기초한 전국적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전평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 등을 배제하고 노동자와 농민, 소시민과 ‘양심적’ 민족 자본가를 비롯한 진보적 정치⋅사회 세력들과 연대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우익 청년 단체의 협조를 받고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하여 전평의 활동에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동일한 우익계 노동조합의 결성을 후원하였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바로 대한노총이었다. 1946년 3월 10일 대한 노총이 결성되었다. 당시 결성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 대표는 48명이었는데, 김구(金九, 1876~1949)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안재홍(安在鴻, 1891~1965), 조소앙(趙素昻, 1887~1959)이 고문, 위원장은 홍윤옥, 부위원장은 이일청, 김구(金龜), 권영빈 등이 선출되었다.

대한 노총은 전평처럼 기존의 전국적 산별 단일 노조를 기반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익계 청년 단체와 정당 관계 인사들에 의해 상층부만 먼저 구성된 조직이었다. 대한 노총은 전평 산하의 노조를 축출하는 활동에 따라 전국적인 조직으로 커 나갔다. 강령에서도 알 수 있듯 대한 노총의 목표는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보다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친선’이었다. 대한 노총은 또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전평의 활동을 억제하고 반공 투쟁에 몰두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구성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분단이 고착화될 상황에 처하자 전평은 미군정에 전면적으로 대항하였다. 미군정이 운수부의 25%를 감원하자 전평은 1946년 9월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전평은 9월 23일 철도, 9월 24일 행정 파업을 단행하였고, 파업을 막으려는 대한노총에 맞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0월 7일 파업이 일단락되자 전평은 약화되었고, 대한노총이 대한민국 주요 도시를 장악하게 되었다. 1947년 3월에 일어난 총파업도 대한 노총과 유혈 사태를 벌인 끝에 저지되었다.

전평은 미군정과 경찰, 대한 노총 등 우익 세력의 물리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은 전평을 불법화하고 그 간부들을 구속하였다. 미군정의 탄압과 대한 노총의 세력 확장 움직임이 계속되자 전평의 조합 수와 조합원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1947년 9월 말 전평의 조합 수는 13개, 조합원 수는 2,465명으로 감소하였다. 같은 시기 대한 노총은 산하에 노동조합 221개, 조합원 39,786명을 둔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 뒤 대한 노총은 이승만 정권의 어용 조직으로 전락하여 조직 폭력배와 경찰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고, 4⋅19 혁명 이후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전국 노동조합 협의회와 통합하여 한국 노동조합 연맹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미군정기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에 관한 연구」,,임송자,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4.
저서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 분단국가의 형성과 행정체제의 정비』, 김석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연구』, 안태정,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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