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삼국 시대삼국의 교육 제도

신라의 유학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노니,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忠)과 도(道)를 체득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을 그르치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크게 어지러운 세상이 되면 가히 △을 행할 것임을 맹서한다. 또 따로 이보다 앞서 신미년 7월 22일 크게 맹서하였는데,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

「임신서기석」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天大罪淂誓. 若國不安大乱世, 可{{宀/父/口}}行誓之. 又別先辛未年七月廿二日, 大誓, 詩⋅尙書⋅礼⋅傳倫淂誓三年.

「壬申誓記石」

이 사료는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으로, 신라의 교육과 관련해 특히 교육 내용 및 분야를 전하고 있다. 「임신서기석」은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의 석장사지(石丈寺址)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강돌의 매끈한 면을 활용해 글자를 새겼는데, 돌의 폭은 가장 넓은 부분이 12.5㎝가량이며 길이는 32㎝가량이어서 휴대도 가능하다. 비문은 분량이 많지 않고 파손도 심하지 않아 판독에는 어려움이 없다.

「임신서기석」이 주목을 끈 것은 비문이 순수 한문식 문장이 아니라 우리말식 한문 표기인 이른바 ‘훈석식(訓釋式)’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서기석」의 독특한 문체를 ‘서기체(誓記體)’라 부르기도 하며, 국어학적 측면에서 「임신서기석」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신라의 교육, 특히 유학과 관련한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문에 따르면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은 충(忠)과 도(道)를 체득할 것을 맹서하는 한편, 그보다 앞선 신미년 7월 22일 『시경』⋅『상서』⋅『예기』⋅『춘추전』 등의 유교 경전을 3년 내에 차례대로 습득하기로 맹서하였다고 한다. 이는 모두 유학의 기본 경서라고 할 수 있는 오경(五經)에 속한다. 『시경』은 종묘에서 쓰던 악가(樂歌)와 민요 등 중국의 고대 시가를 모아 엮은 것이다. 이와 달리 『상서』는 요임금과 순임금 이래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 상고시대의 정치에 대해 기록한 것이고, 『춘추전』 역시 춘추시대 노나라 은공(隱公)에서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 12공(公)의 사적(事跡)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예기』는 예에 대한 기록과 주석 등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경』 등의 유교 경전은 내용 자체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3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익히기 위해서는 상당한 한문 실력이 요구된다.

비문의 ‘임신년’은 552년(진흥왕 13년), 612년(진평왕 34년), 672년(문무왕12년), 732년(성덕왕 31년)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는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시경』⋅『상서』⋅『예기』 등이 신라 국학(國學)에서 배우는 주요 교과목이라는 점에서 국학 설치 이후인 임신년 732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이라고 해서 유교 경전을 습득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권44의 김인문(金仁問, 629~694) 열전을 살펴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유가의 책을 비롯해 장자(莊子)⋅노자(老子)가 쓴 책을 읽었다고 전한다. 이를 보더라도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에 유교 경전이 신라 사회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임신서기석」의 작성 시점인 임신년이 언제인지, 나아가 화랑이 비문을 썼는지 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삼국 통일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임신서기석」은 진흥왕 대나 진평왕 대에 이미 신라 지식인층에서 『시경』과 『상서』 등의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셈이다. 조선 시대에 과거를 준비하던 것처럼 체계적으로 유교 경전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지식층이 어떻게 학문적 소양을 쌓았는지 보여 줄 뿐 아니라, 신라 유학의 수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임신서기석 제작의 연대와 계층」,『가야통신』10,김창호,가야통신편집부,1984.
「임신서기석에 관한 고찰-화랑의 「천」 및 「국가」관-」,『육사논문집』23,박연수,육군사관학교,1982.
「임신서기석의 서체고」,『미술자료』64,손환일,국립중앙박물관,2000.
저서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편저
「임신서기석」, 최광식,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관련 이미지

임신서기석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