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삼국 시대불교사상의 전개

백제의 미륵신앙과 미륵사

어느 날 무왕(武王)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의 큰 못 근처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니,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知命)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彌勒) 삼회(三會)를 법상(法像)으로 하여 전(殿)⋅탑(塔)⋅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서동(薯童)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유사』권2, 「기이」2 무왕

一日, 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湏創大伽藍扵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問填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填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囯史云,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囯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 獨女之子, 未詳.】.

『三國遺事』卷2, 「紀異」2 武王

이 사료는 백제의 불교 신앙 중 미륵 신앙의 의미를 잘 보여 주는 기록이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도 특히 미륵 신앙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대성(彌勒大聖)을 친견하기를 원하였는데, 꿈에 미륵대성이 나타나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의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전했다. 진자는 꿈에서 깨어나 기뻐하며 그 절에 찾아가니 문 밖에서 한 소년이 웃으면서 반갑게 맞이했는데 그가 바로 미륵선화였다.

사료에 등장하는 진자는 신라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대에 흥륜사(興輪寺)에 있던 승려였다. 신라의 승려인 진자가 미륵선화를 구하기 위해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충청남도 공주의 수원사에 갔다는 내용은 백제에서 미륵 신앙이 매우 성행하였으며 주변 국가에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백제에서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음은 다양한 지역에 미륵과 관련한 사찰들이 지어졌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 사료에서 전하는 미륵사(彌勒寺)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무왕(武王)조에 전하는 이 설화는 미륵사의 창건 설화로, 익산에서 미륵사 터가 발굴되면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또한 2009년에 미륵사지 서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그 창건 연대와 주체가 명시된 금제탑지문(金製塔誌文)이 발견되어 설화로만 전해지던 창건 연대와 주체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미륵사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미륵 신앙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찰이다. 이는 창건 연기 설화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백제 무왕이 부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知命) 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자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에는 미륵 신앙의 모든 특징이 담겨 있다.

미륵 신앙은 미륵 상생 신앙과 하생 신앙이 존재한다. 상생 신앙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상생(上生)하여 도솔천 칠보대(七寶臺) 내의 마니전(摩尼殿) 위에 있는 사자상좌(獅子床座)에 앉아 설법을 하고 화생(化生)한다고 한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미륵사 창건 설화에는 이러한 미륵 상생 신앙과 관련한 여러 요소가 보인다. 우선 지명법사가 주재한다는 사자사는 미륵이 앉아서 설법을 한다는 사자상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설화에는 미륵 하생 신앙적 요소도 동시에 있는데, 미륵 하생 신앙에서는 미래불인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삼회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이러한 미륵 하생 신앙에 따라 본다면 미륵사가 위치한 용화산은 미륵이 설법을 하는 용화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륵상과 전(殿)⋅탑(塔)⋅낭무(廊廡)를 각각 세 개씩 건립하였다는 것은 미륵의 삼회설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징들을 종합해 볼 때 무왕은 용화산 아래 미륵사를 건립함으로써 미륵의 이상 세계를 건립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이 왕위에 올랐던 시기는 관산성(管山城)에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이 전사한 후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이 즉위하면서 관산성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는 한편, 점차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여 다시 신라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그러한 시기에 무왕은 미륵사라는 상징적인 사찰을 창건함으로써 백제의 국력을 하나로 모으려 했으리라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미륵사 창건에서 특히 미륵 하생 신앙을 강조하여 미륵의 출현 이전에 나타나 전 세계를 다스린다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가지는 강력한 왕권의 상징성을 자신에게 투영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백제에서는 다양한 불교 신앙 중에서 미륵 신앙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미륵사는 창건 설화와 가람 배치가 가지는 의미를 볼 때 백제의 미륵 신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에 발견된 다양한 사리장엄구들과 금제탑지문의 명문은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부족한 자료를 보충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백제 사비시대의 미륵 신앙」,『백제연구』43,길기태,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2006.
「미륵사 창건에 대한 미륵 신앙적 배경」,『마한⋅백제문화』1,김삼룡,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1975.
「백제의 미륵 신앙」,『백제연구』21,전촌원징,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90.
저서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신앙 연구』, 길기태, 서경, 2006.
편저
「백제의 미륵 신앙과 계율」, 김두진,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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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복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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