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삼국 시대삼국의 불교 유물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연가(延嘉) 7년인 기미년(己未年)에 고려국(高麗國: 고구려) 낙량동사(樂良東寺)의 주지 경(敬)과 그 제자인 승(僧) 연(演)을 비롯한 사제(師弟) 40인이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는바, 제29번째의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扌+(亠/去)}}{{(牛 /火)+頁}}이 공양한 것이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延嘉七年, 歲在己未, 高麗國樂良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人, 造賢劫千佛流布, 第廿九囙現義佛, 比丘{{扌+(亠/去)}}{{(牛 /火)+頁}}供養.

「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이 사료는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의 명문(銘文)이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1963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되었다. 광배⋅불상⋅대좌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갖추어져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국보 제119호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문은 광배의 뒷면에 육조풍(六朝風) 해서로 음각되었다. 글자는 4행으로 모두 47자이다. 명문의 내용은 고구려 낙량동사(樂良東寺) 주지 경(敬)과 그 제자 연(演)을 비롯한 사제(師弟) 40명이 천불(千佛)을 유포하고자 이 불상을 만들어 공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문을 통해 이 불상이 고구려에서 제작되었고, 그 의미가 현겁천불(賢劫千佛)의 하나이며, 이것이 29번째 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겁천불은 천불(千佛)의 일종이다. 천불의 제작은 과거, 현재, 미래의 3겁(三劫)에 각각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천불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과거천불⋅현재천불⋅미래천불을 과거장엄겁천불(過去莊嚴劫千佛)⋅현재현겁천불(現在賢劫千佛)⋅미래성수겁천불(未來星宿劫千佛)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현겁은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긴 시간을 말하는데, 이 시기에는 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비롯한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난다고 한다. 곧 천불에는 이미 출현한 4명의 부처와 미륵불을 비롯해 앞으로 출현할 996명의 부처가 포함된다. 현겁천불 신앙은 인도⋅중국⋅한국⋅일본에 걸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데, 이 명문을 통해 고구려에서도 그 신앙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의 불상이 어떠한 경로로 경상남도 지역에서 발견되었는지가 의문인데, 이 점은 한국 고대 불교사상의 수용 및 전파와 관련하여 중요한 과제이다.

한편 이 불상과 관련하여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명문에 제작 연도로 기록된 연가(延嘉) 7년의 연도 비정 논쟁이다. 대체로 ‘연가’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기미년(己未年)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고려국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5세기 중반 이후임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479년(장수왕 68년)인지 아니면 539년(안원왕 9년)인지, 혹은 599년(영양왕 10년)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연도를 올려서 419년(장수왕 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차이는 불상의 형식, 현겁철불 신앙의 수용 혹은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영향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먼저 419년설은 왕의 재위년을 보는 방법 중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에 따르면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491) 8년이 기미년으로 연호와 간지가 잘 부합한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다. 한편 539년설은 연가 7년명 불상이 입고 있는 복식에 근거한다. 이 설에 따르면 불상이 인도식 복식이 아닌 한족(漢族)의 복식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북조(北朝)에서 486년 혹은 494년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의 복제 개혁 이전에 등장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이 불상이 제작된 시기는 494년 이후 돌아오는 첫 기미년인 539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두 기미년의 중간 해인 479년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주장은 장수왕이 재위 62년인 473년에 개원하면서 ‘연가’ 연호를 썼을 경우 연가 7년은 479년이 된다는 점, 그리고 한족 복식의 불상이 효문제의 복제 개혁 이전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개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479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의견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따라서 향후 비교가 가능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 한층 종합적인 시각에서 새로운 검토될 여지가 있다고 전망된다.

한편 이 사료에서 {{扌+(亠/去)}}{{(牛 /火)+頁}}은 불상을 만든 비구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를 찧을 ‘도(擣)’, 이삭 ‘영(穎)’으로 판독하여 탈곡하는 자, 즉 농부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비구와 농부가 불상을 공양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상과 같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비교적 짧은 명문만을 남기고 있지만, 비단 고구려의 불교사상만 아니라 한국 고대 불교사상의 수용과 전파, 나아가 고구려의 남진과 같은 여러 사항과 맞물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의 연호」,『한국사학보』5,정운용,고려사학회,1998.
저서
『고구려 불교사 연구』, 정선여, 서경문화사, 2007.
편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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