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어느 민가 여인의 얼굴과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다. 진지왕(眞智王)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그녀를 범하려 하니 여인이 말하였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 데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천자[萬乘]의 위엄으로도 마침내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하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어찌 다른 마음 가지기를 원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라고 하자 여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그녀를 보내 주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는데 2년 후에 그녀의 남편도 역시 죽었다.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홀연히 왕이 평시와 같이 나타나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하길, “네가 옛날에 허락한 것처럼, 지금 너의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라고 하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모가 말하기를, “임금의 교시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라며 딸을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7일 후에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여인은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할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마침내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다. 나이가 15세가 되자 집사(執事)라는 직책을 주었다. 비형은 매일 밤 멀리 나가서 놀자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으나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으로 가서 황천(荒川) 언덕 위
【경성(京城)의 서쪽에 있다.】
에서 귀신 무리를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 속에 매복하여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에 각각 흩어지고 비형랑도 역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군사들은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이 비형을 불러 묻기를, “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사실이냐?”라고 하자 비형랑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러하면 너는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神元寺)의 북쪽 도랑
【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어떤 이는 황천(荒川)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
에 다리를 놓아 보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귀교(鬼橋)라고 이름 하였다.
왕이 또 묻기를 “귀신의 무리 가운데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조정(朝廷)을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라고 하자 비형이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가히 국정을 도울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왕을 알현하니 왕이 길달에게 집사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과연 충직한 것이 비길 자가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여 아들로 삼도록 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누문(樓門)을 세우게 하였더니,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 위에 가서 잤으므로 그 문을 길달문(吉達門)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갔으므로 비형이 귀신들로 하여금 그를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귀신의 무리는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성스런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뛰는 잡귀의 무리들은 이곳에 머물지 마라.”라고 하였다. 나라의 풍속에는 이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친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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