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음악은 삼죽(三竹), 삼현(三絃), 박판(拍板), 대고(大鼓), 가무(歌舞)였다. ……(중략)…… 삼현은 첫째는 거문고, 둘째는 가야금, 셋째는 비파였다. 삼죽은 첫째는 대금(大笒), 둘째는 중금(中笒), 셋째는 소금(小笒)이었다.
거문고(玄琴)는 중국 악부(樂部)의 금(琴)을 본받아 만들었다. ……(중략)…… 거문고의 제작에 대하여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악과 타는 법을 몰랐으므로, 나라 사람 중에 그 음을 알아서 탈 수 있는 자를 찾으면서 후한 상을 걸었다. 그때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그 본래 모양을 보존하면서 자못 그 법제를 고쳐서 만들고, 아울러 100여 곡을 만들어 연주하였다. 이때 검은 학[玄鶴]이 와서 춤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이름 하였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신라 사람 사찬(沙湌) 공영(菾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 지 50년에 스스로 신조(新調) 30곡을 만들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다. 속명득이 이를 귀금선생(貴金先生)에게 전하니, 선생 또한 지리산(地理山)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이 거문고의 이치와 타는 법[琴道]이 단절될까 우려하여 이찬(伊湌) 윤흥(允興)에게 일러 ‘방편을 써서라도 그 음을 전할 수 있게 하라.’라고 하였다. ……(중략)……“
가야금(加耶琴)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 ……(중략)…… 『신라고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가야국(加耶國) 가실왕(嘉實王)이 당(唐)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으랴?’ 하고는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후에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악기를 지니고 신라 진흥왕(眞興王)
에게 투항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 국원(國原)에 안치하고, 대나마(大奈麻) 주지(注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 그 업을 전수받게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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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비파(鄕琵琶)는 당나라의 제도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으나 다만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 음은 세 조(調)가 있으니, 첫째는 궁조(宮調), 둘째는 칠현조(七賢調), 셋째는 봉황조(鳳凰調)로서 모두 212곡이었다.
삼죽(三竹)도 당나라의 적(唐笛)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중략)……
고구려 음악(高句麗樂)은 『통전(通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 음악에는 탄쟁(彈箏) 하나, 추쟁(搊箏) 하나, 와공후(臥箜篌) 하나, 수공후(竪箜篌) 하나, 비파 하나, 오현(五絃) 하나, 의취적(義觜笛) 하나, 생(笙) 하나, 횡적(橫笛) 하나, 소(簫) 하나, 소필률(小篳篥) 하나, 대필률(大篳篥) 하나, 도피필률(桃皮篳篥) 하나, 요고(腰鼓) 하나, 제고(齊鼓) 하나, 담고(擔鼓) 하나, 패(貝) 하나를 썼다. 당나라(大唐) 무태후(武太后) 때는 오히려 25곡이 있었으나, 지금은 오직 한 곡을 익힐 수 있고, 의복도 차츰 낡아 없어져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악기에는 오현(五絃), 금(琴), 쟁(箏), 필률(篳篥), 횡취(橫吹), 소(簫), 고(鼓) 등의 종류가 있으며, 갈대를 불어 곡조를 맞추었다.”
백제 음악(百濟樂)은 『통전(通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 악기로 남은 것은 쟁(箏), 적(笛), 도피필률(桃皮篳篥), 공후(箜篌)였다. 악기 등은 대부분 중국[內地]과 같다.”
『북사(北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鼓), 각(角), 공후(箜篌), 쟁(箏), 우(竽), 지(箎), 적(笛) 등의 악기가 있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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