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삼국 시대삼국의 예술과 문화

일본에 문화를 전수한 아직기와 왕인

[응신천황] 15년(284) 가을 8월 임술삭(壬戌朔) 정묘(丁卯)에 백제 왕이 아직기(阿直伎)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輕)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구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에게 사육을 맡겼다. 이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구판(廐坂)이라고 한다. 아직기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이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라고 물으니, “왕인(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始祖)다.

『일본서기』권10, 「응신천황」 15년

十五年秋八月壬戌朔丁卯, 百濟王遣阿直伎. 貢良馬二匹. 卽養於輕坂上廐, 因以阿直岐令掌飼. 故號其養馬之處, 曰廐坂也. 阿直岐亦能讀經典, 卽太子菟道稚郎子師焉. 於是天皇問阿直岐曰, 如勝汝博士亦有耶, 對曰, 有王仁者, 是秀也. 時遣上毛野君祖荒田別⋅巫別於百濟, 仍徵王仁也. 其阿直岐者, 阿直岐史之始祖也.

『日本書紀』卷10, 「應神天皇」 15年

이 사료는 백제와 일본의 교류 형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4세기 이후 고대사에서 백제와 일본의 교류는 주로 백제에 의한 선진 문물 전수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일본에서 군사력과 같은 인적 자원을 보내 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특히 백제에서는 박사(博士), 장인(匠人) 등 선진 기술을 전해 줄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왜(倭)에 많이 보내 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직기(阿直岐, ?~?)와 왕인(王仁, ?~?)이다. 이들은 모두 유교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인의 경우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져와 태자를 가르쳤다고 전하는 것으로 볼 때, 백제는 이미 이 시기 이전에 유학이 전해졌으며 경전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밝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 응신친황(應神天皇) 15년(284)조에 의하면, 왜가 왕인을 초빙하게 된 계기가 아직기의 천거에 있다고 서술하는 데 반해, 『고사기(古事記)』의 ‘아지길사(阿知吉師 : 아직기)’와 ‘화이길사(和邇吉師 : 왕인)’의 사례는 서로 직접적인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는 별개의 이야기로 구성되고 있다. 이는 『속일본기(續日本記)』 연력(延曆) 10년(791) 4월 8일조의 기사에서도 왕인의 도래가 언급되는 데 반해 아직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에 아직기가 관여하고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는 원래 별개의 전승을 『일본서기』 편자가 윤색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아직기 전승과 관련해서는 사료상에 보이는 아직기의 도일(渡日) 연대가 백제의 왕력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일치하지 않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직기가 응신천황 대에 일본에 갔다면 그 재위 연간은 『일본서기』의 기년으로 270~310년이다. 이것을 백제 왕력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2주갑을 내린 390~430년이 된다. 그런데 『고사기』에는 “백제국주(百濟國主) 소고왕(照古王)이 아직기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소고왕이 근초고왕(近肖古王)이라면 그의 재위 연대가 346~375년이므로 응신조의 환산 연대와 맞지 않는다.

한편 왕인은 일본에 유학을 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인은 『고사기』 중권 응신(應神)조의 기록에 보이는 화이길사로 추정되며, 그는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왕인이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다. 『천자문』은 일반적으로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 470~521년)가 만든 것으로 보는데, 왕인이 왜에 파견된 시기가 4세기 말인 점을 생각한다면 그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사기』와는 달리 『일본서기』에서는 왕인의 『천자문』 전래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달리 왕인이 전한 『천자문』을 주흥사의 『천자문』이 아니라 종요(鍾繇, 151~230년)가 만든 『천자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현재 일본에서는 종요의 『천자문』에 관한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천자문』의 전래 기사는 왕인의 활동 시기 및 『일본서기』 등에 전하는 한국 관계 기사의 신빙성 여부를 살피는 데 있어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4∼5세기 가야와 백제⋅야마토왜의 관계」,『한국고대사논총』6,김현구,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편,1994.
「백제근구수왕의 대외활동과 정치적 위치」,『백제논총』6,양기석,백제문화개발연구원,1997.
「왕인의 『천자문』⋅『논어』일본전수설 재검토」,『역사비평』69,이근우,역사문제연구소,2004.
「『일본서기』속의 백제왕력소고」,『일본학』20,이재석,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2001.
편저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Ⅰ, 김현구 외, 일지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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