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禪師)의 이름은 체징(體澄)이며 종성(宗姓)인 김(金)씨로 웅진(熊津) 사람이다. 가문은 좋은 명망을 이었고 어진 가풍을 익혀 왔다. 이런 까닭으로 경사가 하늘로부터 모이고 덕이 큰 산에서 내려오니 효의(孝義)는 향리에 드날렸고 예악(禮樂)은 고관들 중 으뜸이었다. ……(중략)……
처음에 도의대사(道儀大師)가
【서당(西堂 : 지장(智藏). 마조도일(馬組道一)의 수제자 중 한 명)】
에게 심인을 받은 후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설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을 숭상하고 있어, 무위임운(無爲任運: 참선)의 종(宗)은 아직 이르지 아니하여 허망하게 여기고 존숭하지 않음이 달마(達摩)가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咐囑)
불법의 보호와 전파를 다른 이에게 맡겨 부탁함
하였다. (염거선사는)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러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우리 선사가 가서 섬겼다. 일심을 맑게 수양하고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 몸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염거선사의 뜻과 기품에 짝할 사람이 없고 소양과 기개가 빼어남을 살피고 현주(玄珠)
검은 구슬. 깊은 진리를 의미함
를 부촉하고 법인을 전수하였다. 개성(開成) 2년 정사(丁巳, 837년, 희강왕 2년)에 동학인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길을 떠나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찾아보고 15주(州)를 편력하여 그 세상도 좋아하고 즐기려는 마음이 똑같고 성상(性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말하기를, “우리 조사가 설한 바는 덧붙일 것 없으니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랴!” 하고는 발걸음을 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 5년(840년, 문성왕 2년) 봄 2월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고국에 돌아와 고향을 교화하였다. 이에 단월(檀越)이 마음을 기울여 불교가 계속 이어지니, 온 하천이 오산의 골에서 시작되고 뭇 산령이 영취산(靈鷲山)을 마루로 하는 것으로도 비유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다.……(중략)……
겨울 10월, (문성왕이) 교(敎)로써 도속사(道俗使) 영암군(靈巖郡) 승정(僧正) 연훈법사(連訓法師)와 봉신(奉宸) 풍선(馮瑄) 등을 보내 왕의 뜻을 설명하여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석장(錫杖: 승려가 지니는 18물(物) 중 하나로 지팡이)을 날려 산문에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중략)……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별자(別子)가 조(祖)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강성(康成)이 주를 붙이기를, “그대가 만약 처음으로 이 나라에 왔다면 후세에서 조(祖)로 생각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달마는 당(唐)나라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곧 도의대사를 제1조, 염거선사를 제2조로 삼고 우리 스님을 제3조로 한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