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臣)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겨를 없이 현자(懸刺)1)
하며 양지(養志)
그러다가 뒤이어 동도(東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 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
현자(懸刺) : 현두자고(懸頭刺股)의 준말. 졸음을 쫓기 위해 한(漢)나라 손경(孫敬)은 상투를 끈으로 묶어 대들보에 걸고,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면서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다는 고사.
부모의 뜻을 받들어 지극한 효도를 다하는 일
에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로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을 하면 자신은 천의 노력을 행함
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쓴 방
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정성(情性)을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이것들은 어린아이가 전각(篆刻)
돌⋅나무⋅금 등에 인장(印章)을 새김, 또는 그 글자
하는 것과 같아 장부(壯夫)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2)
2)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 : 과거 급제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그동안 예행 연습으로 지었던 시문들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는 의미이다.
그 뒤 선주(宣州) 율수현위(凓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부르게 먹고 하루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만,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文集) 5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만들려는 뜻을 더욱 분발하여 ‘복궤(覆簣)’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마침내 그 지역의 명칭인 중산(中山)을 첫 머리에 올렸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淮南)의 군직을 맡으면서 고시중(高侍中)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였던 고변(高騈)
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있는 힘껏 담당하여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선별하며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에 비유하겠습니까만, 그래도 기왓장을 깨트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계원집(桂苑集)』 20권을 우겨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침 난리를 당하여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이른바 여기서 미음을 끓여 먹고 죽을 끓여 먹는 신세가 되었으므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왕소(王韶)의 말을 가지고 예전의 일을 고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몸을 움츠린 채 돌아와서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이들에게 부끄럽기는 합니다만, 일단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서 위로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부⋅표(表)⋅장(狀) 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계원필경집』, 계원필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