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통일 신라와 발해발해의 문화

발해의 도성 상경성

천보(天寶) 연간(741~756) 말년 [대]흠무([大]欽茂, 재위 737~793)가 [도성을] 상경(上京)으로 옮기니, 구국(舊國)에서 300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다. ……(중략)…… 정원(貞元) 연간(785~805)에 [도성을] 동남쪽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중략)…… [대]굉림([大]宏臨)의 아들 [대]화여([大]華璵, 재위 793~794)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다시 상경을 도성으로 삼았다. ……(중략)…… 국토는 5경(京)⋅15부(府)62주(州)이다. 숙신(肅愼)의 옛 땅을 상경으로 삼았으니, [부명은] 용천부(龍泉府)이며, 용(龍)⋅호(湖)⋅발(渤)의 3주(州)를 통치하였다.

『신당서』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

天寶末, 欽茂徙上京, 直舊國三百里忽汗河之東. ……(中略)…… 貞元時, 東南徙東京. ……(中略)…… 推宏臨子華璵爲王, 復還上京. ……(中略)……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以肅愼故地爲上京, 曰龍泉府, 領龍⋅湖⋅渤三州.

『新唐書』卷219, 「列傳」144 北狄 渤海

이 사료는 북송(北宋) 대에 구양수(歐陽脩, 1007~1072) 등이 편찬한 『신당서(新唐書)』 가운데 상경성(上京城)과 관련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발해는 모두 4차례에 걸쳐 천도를 단행하였는데, 그 중 상경성은 발해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도성으로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발해가 대내외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국력을 신장하였던 시기도 바로 수도를 상경성에 두었을 때였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상경성으로 천도한 때가 천보(天寶) 연간(741~756) 말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신당서』 권219에 따르면 구국(舊國)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신당서』 권43(하) 지리지7(하) 기미주(羈縻州) 등주(登州)조와 송(宋)나라 인종(仁宗, 재위 1022~1063)이 1040년에 명하여 만든 『무경총요(武經總要)』 전집(前集) 권16(하)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상경으로 천도하기에 앞서 구국에서 현주(顯州)로 천도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상경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수도는 구국이 아닌 현주인 것이다. 755년 당(唐)에서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는데, 발해는 여기에 대비하고 더불어 거란에 대한 방비도 겸하여 상경으로 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 대흠무(大欽茂), 즉 문왕(文王, 재위 737~793)상경성으로 천도한 이후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천손(天孫)’과 ‘황상(皇上)’의 칭호를 사용하여 한층 강화된 왕권을 과시하였다. 그러다 정원(貞元) 연간(785~805) 동경성(東京城)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成王, 재위 793~794), 즉 대화여(大華璵)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상경성으로 도성을 옮겼다. 이후 상경성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도성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신당서』에 따르면 숙신(肅愼)의 옛 땅을 상경(上京)으로 삼고 용천부(龍泉府)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상경성은 오늘날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발해진(渤海鎭)에 위치하고 있다. 발해 상경성 유지(遺址)는 17세기에 몇몇 중국 학자들이 금(金)나라 도성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9세기에 여러 학자들의 조사를 통해 발해 상경성으로 밝혀졌다. 상경성은 1933년과 그 이듬해에 일본 동아 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서 처음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면서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63년과 1964년에는 중국과 북한의 학자들이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朝中共同考古學發掘隊)를 결성하여 공동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후 1979년에는 영안현 문물 관리소(寧安縣文物管理所)가 중심이 되어 부분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1981년 이후에는 흑룡강성 문물 고고 공작대[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를 주축으로 부분적인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동안의 발굴 조사 결과 상경성은 외성(外城)-궁성(宮城)-황성(皇城)으로 구성되었으며, 외성의 전체 평면은 동서가 조금 더 긴 장방형으로 밝혀졌다. 1965년에 간행된 발굴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동벽은 3,358.5m, 서벽은 3,406m, 남벽은 4,586m, 북벽은 4,946m에 이른다. 이러한 도성의 규모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장안성(長安城) 다음으로 큰 규모로, 이를 통해 발해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황성의 남문에서 외성의 남문까지 뻗어 있는 너비 110m의 주작 대로(朱雀大路)는 도성을 동서로 양분하였으며, 외성 내부는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직선 도로가 교차하면서 전체가 바둑판 모양처럼 질서정연한 형태로 구획된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는 상경성이 기본적으로 당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궁전 건물은 뒤로 가면서 규모가 커지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해 상경성의 경우 뒤로 갈수록 궁전의 회랑 영역이 줄어드는 독특한 형태를 보이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발해는 중국의 도성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개별 건물의 배치 등에서는 문화적 독자성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상경성 발굴 조사를 통해 7개의 궁전 가운데 5개 궁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각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이 확인되면서 궁전의 전체적인 배치 구조도 밝혀졌다. 특히 제4 궁전 건물과 서쪽 구역의 침전 터에서는 온돌 시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또한 관청, 성문, 정원, 우물 등도 일부나마 옛 흔적이 발굴되면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도성이었던 상경성의 영화로웠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8세기말 발해의 천도와 북방민족관계」,『고구려발해연구』41,권은주,고구려발해학회,2007.
「발해의 상경 건설과 천도」,『한국고대사연구』 45,김기섭⋅김진광,한국고대사학회,2007.
「발해의 천도와 그 배경」,『한국고대사연구』 36,송기호,한국고대사학회,2004.
「발해의 천도에 대한 고찰」,『청계사학』 5,임상선,청계사학회,1988.
저서
『발해정치외교사연구』, 김종복, 일지사, 2009.
『발해정치사연구』, 송기호, 일조각, 1995.
편저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송기호, 국사편찬위원회, 1996.
「발해의 성곽」, 신창수,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건축 문화」, 이병건, 동북아역사재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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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상경성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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