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고려 시대불교 사상과 신앙

대각국사 의천의 해동 천태종 창시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원공(源公)과 작별 인사를 하고 천태산(天台山)에 이르렀다. 정광불롱(定光佛隴)의 봉우리에 올라 지자 대사(智者大師)가 친히 쓴 발원문을 보고, 지자 대사 탑 앞에서 예를 올린 후 동녘 땅에 돌아가서 천태종을 전할 것을 맹세하였다. 양공(楊公)이 이를 기록하고, 승려 중립(中立)이 비석을 세웠다. ……(중략)……

곧 서울로 달려가 다시 흥왕사(興王寺)에 거처하면서 교리를 처음과 같이 강의하였다. 정축년(1097, 숙종 2) 여름 5월 국사는 국청사(國淸寺)에 주지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의하였다. 이 천태종은 옛날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나 중간에 폐지되었다.

대각 국사전당(錢塘)에서 종간 법사(從諫法師)에게 도를 묻고 불롱(佛隴) 의 지자 대사 탑 아래서 서원을 세워 천태종을 일으킬 뜻을 가진 뒤로 일찍이 하루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인예 태후(仁睿太后)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숙종(肅宗)이 이어서 마침내 불사를 끝냈다.

국사가 이때에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이치를 나타내었고, 이치를 연구하기에 마음을 다하여 지(止)관(觀)이 뚜렷하여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 문자만을 믿고 지키는 것을 뽑아 없애고 악취공(惡取公)의 고집을 깨뜨렸다.

그리하니 일시에 학자들이 성인의 경계를 우러러 옛것을 버리고 스스로 귀의해 오는 자가 거의 1,000명에 이르렀으니 성대하였다.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의하는 이들이 국사를 백세에 으뜸가는 종장이라 하니, 어찌 그 말을 믿지 않겠는가!

대각국사문집』 외집 권12, 비명 영통사비

○禮辭源公, 行至天台. 登定光佛隴, 觀智者親筆願文, 禮於塔前, 誓傳敎于東土. 楊公志之, 沙門中立立石. ……(中略)…… 乃赴都, 復居興王寺, 敎學如初. 丁丑夏五月, 住持國淸寺, 初講天台敎. 是敎嘗已東, 漸而中廢. 師自問道於錢塘, 立盟於佛隴 思有以振起之, 未曾一日忌於心. 仁睿太后聞而悅之, 經始此寺, 肅祖繼之, 以畢厥功. 師於此之時, 依文而顯理, 究理而盡心, 止觀圓明, 語默自在. 拔盡信書之守, 破惡取空之執. 一時學者, 瞻望聖涯, 捨舊而自來, 幾一千人, 盛矣哉. 世之議台宗者, 謂師百世不遷之宗, 渠不信哉.

『大覺國師文集』 外集 卷12, 碑銘 靈通寺碑

이 사료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이 송(宋)나라에 들어가 고승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고려에 돌아와 천태종을 열었음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중 ‘고려국 오관산 대화엄 영통사 증시 대각국사 비명 병서(高麗國五冠山大華嚴靈通寺贈諡大覺國師碑銘並序)’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대각 국사의 본래 이름은 후(煦)였으며, 자(字)는 의천이었다. 문종(文宗, 1019~1083, 재위 1046~1083)과 인예 태후(仁睿太后, ?~1092)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경덕왕사(景德王師) 난원(爛圓, 999~1066)에게 삭발하고 화엄종 영통사에서 불교에 귀의하였다. 1101년(숙종 6) 향년 47세, 승려가 된 지 36년 만에 입적하여 영통사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숙종(肅宗, 1054~1105, 재위 1095~1105)의천이 입적하자 국사로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이라 하여 그를 기렸다.

의천문종 대에 송나라로 구법행(求法行)을 떠나고자 했으나 문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종(宣宗, 1049~1094, 재위 1083~1094) 즉위 후에도 선종과 모후인 인예 태후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1085년(선종 2) 31세에 송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다. 그의 소식을 접한 송나라 철종(哲宗, 1074~1100, 재위 1075~1100)은 변경(汴京) 계성원(啓聖院)에 그를 맞아들이고 수공전(垂拱殿)에서 직접 만났다. 이때 의천은 고승 대덕을 두루 만나보기를 청하였는데, 화엄 법사(華嚴法師) 유성(有誠)을 필두로 원조 선사(圓照禪師) 종본(宗本, 1022~1099), 항주의 화엄 좌주(華嚴座主) 정원(淨源)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이후 의천은 중국 천태종의 중심인 천태산에 가서 지자 대사(智者大師, 538~598)의 탑에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 오시 팔교(五時八敎) 로써 동쪽으로 흘러 들어온 일대(一代) 성인의 말씀을 판단 해석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 제관 법사(諦觀法師, ?~970)가 있어 교관(敎觀)을 전했는데 , 이제는 그 배움이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분발하여 목숨을 걸고 스승을 찾아 도를 물은 결과, 이제 전당의 자변강하(慈辯講下)에서 교관을 이어 받았습니다. 다른 날 고국에 돌아가면 목숨이 다하도록 널리 전하여 선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사실상 고려에 가서 천태종을 개창하겠다는 맹세였다.

1086년 5월 고려로 돌아온 의천은 그가 모은 불교 경전 장소(章疏) 3,000여 권을 간행하기 위하여 문종이 창건한 개경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다. 모후인 인예 태후에게는 “천태 삼관(天台三觀)은 최상의 진선(眞善)인데 고려에는 종문(宗門)이 없어 애석하므로 제가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라고 하여 천태종을 일으킬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선종에게 아뢰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수집한 불서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먼저 간행하였다. 또 이후에도 계속 송나라나 요(遼)나라, 일본 등지에서 불교 경전을 수집하고,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서를 수집하여 간행한 『교장(敎藏)』은 1,010부 4,74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불교 연구 총서라 할 수 있다. 의천의 불교 총서는 그간 『속장경(續藏經)』으로 불렸는데, 이는 1910년대 일본 학자들이 부른 호칭이 굳어진 것이다. 『교장』은 실제로는 대장경과 다른 성격의 연구 자료를 모은 독자적 편찬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목록서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으로 볼 때, 서명을 『교장(敎藏)』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이후 의천은 1097년(숙종 2) 국청사(國淸寺)가 완공되자 초대 주지가 되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의하였다. 당대의 불교계는 화엄종과 법상종이 서로 반목하고 선종이 이에 반발하여 말법 시대(末法時代)로 여겨지고 있었다. 의천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종계의 통일과 함께 화엄종을 중심으로 각 종파들을 모았다. 선종을 융합시키고자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교상(敎相)과 실천의 방법을 담은 관심(觀心)도 아울러 닦을 것을 내세웠는데, 바로 경전 읽기와 참선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는 교관병수(敎觀並修)가 이에 해당하였다. 그는 경전 읽기와 참선 수행 중 하나를 내세우는 것은 편집(偏執)에서 나온 것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교종 승려는 내관(內觀)을 닦고 선승들은 교리를 익혀야 병수(並修)가 올바로 행해진다는 설파였다.

이러한 노력은 천태종 근본 도량인 국청사가 낙성되면서 더욱 진척되었고, 이후 1099년(숙종 4) 처음으로 천태종 승려를 선발하는 천태승선(天台僧選)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사료에 보이듯이 옛것을 버리고 귀의해 오는 자가 거의 1,0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의천이 천태종을 융성시켰음을 알려 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사료는 고려의 문화 융성기였던 문종 대부터 불교 교단을 정비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가운데 의천이 송나라에 구도행을 갔다 돌아와 교관병수를 중심으로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는 한편, 천태종을 세워 불교 개혁에 나서면서 고려 불교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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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천태사상연구』, 이병욱, 경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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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교사연구』, 허흥식, 일조각, 1986.
『고려시대 불교계와 불교문화』, 황인규, 국학자료원, 2011.
편저
「천태종의 성립」, 최병헌, 국사편찬위원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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