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尹彦頥)는 글을 잘하였고 일찍이『주역(周易)』의 해설서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하였으며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였다. 나이를 이유로 벼슬에서 은퇴한 후 파평(坡平)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에 가서 거주하면서 호를 금강거사(今剛居士)라 자칭하였다. 일찍이 승려인 관승(貫乘)과 불교를 같이 닦는 벗[空門友]이 되었다. 관승이 겨우 한 사람이 앉을 만한 포암(蒲菴)
창포로 지붕을 이은 조그마한 암자
을 지어놓고, 두 사람 중 먼저 죽는 사람이 여기서 좌선(坐禪)하여 죽자고 약속하였다. 하루는 윤언이가 소를 타고 관승을 찾아가서 이 세상 떠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곧바로 돌아왔더니 관승이 사람을 포암에 보냈다. 윤언이가 웃으며 “스님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구나!”라고 말한 후 붓을 들어 암자 벽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봄 지나 다시 가을 되니, 피는 꽃 지는 잎이로세. 동서로 오가면서 내 본성을 잘 길렀도다. 오늘 가는 길 도중에 이 몸 돌이켜보니, 만리 먼 하늘에 한 조각 한가한 구름이로세.’
글을 쓰고 나서 그 포암에 앉아서 죽었다. 윤언이는 재상의 몸으로 국가 풍속의 교화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괴이한 행동을 하여 우매한 속인(俗人)을 현혹하게 했으므로 당시의 지식인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고려사』권96, 「열전」9 [제신] 윤관
'윤관' 관련자료
윤언민(尹彦旼)은 어려서 공부할 때부터 사람됨이 담백하고 조용하였다. 불교에 마음을 돌려『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즐겨 읽고, 견성(見性)
불교 용어로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닫는 것
과 관공(觀空)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부처를 섬기는 일 이 외에 또 의술을 공부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일로 삼았으니, 진실로 마음에 아무 집착이 없어 가히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 할 만하다. ……관직에 등용되어서는 재산을 모으지 않고, 날마다 푸른 소1)
를 타고 관청으로 나가 낮에는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불경을 외었다. 인종(仁宗)
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탄복해 마지않다가, 직접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 위에다 임금의 글씨를 더하여 ‘일장선생이 푸른 소를 타고 불경을 외우는 그림(日章先生騎靑牛念經之圖)’ 이라 불렀는데, 온 나라 안 사람이 베껴 전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1)
고대 중국의 사상가인 노자(老子)가 자신의 뜻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속세를 떠날 때 타고 갔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인종(仁宗)' 관련자료
……다음 날 병야(丙夜)
밤 11시에서 1시 사이
가 되니 가부좌를 틀고 죽었는데, 향을 사르고 손을 거두자 죽음이 마치 집에 돌아간 것처럼 평안하게 돌아가셨다. 향년 60세이고 그 용모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뒤 평생 더불어 지낸 도교와 불교계의 도가 높은 인물들이 모두 앞에 나와 분향하고 예를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한국금석전문』중세상편, 윤언민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