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고려 시대도교와 풍수지리설

임완의 풍수지리설 비판

요사이 묘청(妙淸, ?~1135)이 괴이하고 허황된 말을 많이 하였는데 신이 보기에 묘청은 오직 간교한 사기술을 일삼아 임금을 속이고 있는 것이 송나라 때의 임영소(林靈素, ?~1119)1)와 다름이 없습니다. 임영소가 그릇된 도술로써 휘종(徽宗, 1082~1135)을 현혹하니 벼슬에 급급한 선비들이 그에게 허리를 굽히고 아첨하여 영화와 현달을 구하였습니다. 그 당시 천재지변이 여러 번 나타났지만 휘종은 깨닫지 못하다가 지혜와 계책이 궁해지자 끝내 난리가 나 패망하고 말았으니, 비록 그 후에 임영소를 죽이긴 했으나 무슨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이 일은 폐하께서도 친히 들으신 것이니, 그 실패를 어찌 되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묘청을 총애하고 신임하시니 측근의 신하와 여러 대신들까지 서로서로 그를 추켜세워 성인(聖人)으로 여기게 되니, 이제 악의 뿌리가 깊고 꼭지가 단단해져서 좀처럼 뽑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태화궁(太華宮)의 공사 이후로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지난해 순행하실 때 재앙이 불탑(佛塔)에서 발생하였고, 올해 순행하실 때에는 유성(流星)과 말[馬]의 재앙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또한 태화궁은 본래 복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벌써 7~8년이 지났으나 좋은 징조는 하나도 없고 재변만 자주 나타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의 뜻이 만약 “너희 간사한 무리가 임금을 현혹시키고 있는데, 비록 사람은 속인다 해도 하늘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라면, 전날의 재변은 하늘이 폐하께 경고하여 깨닫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간신 한 사람을 아껴서 하늘의 뜻을 거역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군왕의 위엄을 떨쳐서 묘청의 머리를 베어, 위로는 하늘의 경계에 답하시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달래어 주십시오. 이것은 천하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이며 어리석은 저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오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이를 잘 살펴주시옵소서.

『고려사』권98, 「열전」11 [제신] 임완

1)원래 승려였다가 환속해 도교를 익힌 도사(道師)이다. 북송 휘종의 신임을 받아 항상 측근에 있으면서 각지에 도관을 세워 도사를 우대하게 하였다. 휘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치를 좌우하고 횡포하고 방자하게 굴었으나 결국 휘종의 노여움을 사서 초주에 유배되어 죽었다.

近日怪誕之說, 大起於妙淸, 臣觀妙淸, 惟事姦詐, 欺君罔上, 與宋朝林靈素無異也. 靈素挾左道, 眩惑上皇, 躁進之士, 屈己諂事, 以求榮顯. 當是之時, 災變屢見, 而上皇不悟, 及至智盡計窮, 終於敗亂而後已, 雖誅靈素, 何益於事.

此陛下之所親聞也, 覆車之轍, 其可蹈乎. 陛下寵信妙淸, 左右近習, 及諸大臣, 交相薦譽, 以爲聖人, 根深蔕固, 牢不可拔. 自太華宮之役, 勞民動衆, 百姓怨咨. 往歲巡幸, 災發佛塔, 今年巡幸, 流星馬禍, 相繼而作. 且此宮闕, 本爲求福, 今已七八年, 而無一休祥, 災變荐至, 其故何也.

天意若曰, 姦邪之人, 熒惑人主, 人雖可欺, 天可欺乎, 前日之變, 天其或者警悟陛下耳. 陛下豈可惜一姦臣, 而違天意乎. 願陛下, 奮乾剛之威, 斬妙淸之首, 上以答天戒, 下以慰民心. 此天下之公言, 非愚臣之敢私也, 惟陛下察之.

『高麗史』卷98, 「列傳」11 [諸臣] 林完

이 사료는 1134년(인종 12년) 국자사업지제고(國子司業知制誥)로 있던 임완(林完, 1088~1152)이 올린 상소로, 그는 여기서 유교적 천인합일 사상에 입각해 묘청(妙淸, ?~1135)서경 천도 운동을 비판하고 묘청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임완의 원래 이름은 임광(林光)으로, 송나라 때 남해 무역의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이었던 장주(漳州) 출신의 송나라 진사였다. 1112년(예종 7년)에 무역선을 타고 개경으로 와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1114년(예종 9년) 3월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며,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때 수창궁 옆 서적소(書籍所)에서 근무했고, 이후 국자사업지제고로 전임하였다. 상소를 올린 시기는 그간 서경 천도에 적극적이던 인종이 대외 정세의 변화와 서경에서 발생한 재변 등으로 인해 천도 의지가 약화된 시기였다. 서경 천도에 반대하던 세력들은 이때부터 일제히 반격을 시작해 묘청 등의 주장을 비판하고 그들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임완의 상소가 그 대표적 예다.

임완의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유교와 풍수지리설의 대립이라는 사상적 측면 외에도 서경 천도 세력과 반대 세력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도 고찰해 볼 수 있다. 우선 정치적 측면을 보면,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정치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묘청서경 천도 운동이 추진될 당시의 고려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누적되면서 농민들의 유망(流亡)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금나라가 성장하여 고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었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李資謙, ?~1126)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실추되자 인종은 왕권 강화와 정치 분위기 일신을 위해 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즈음 도선(道詵, 827~898)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서경 승려 묘청이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지덕이 쇠한 개경을 버리고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묘청서경 임원역(林原驛)의 지세가 풍수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花勢)이므로 만약 이곳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주변 36개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서경 천도 운동묘청 이 외에도 중앙 관리인 정지상(鄭知常, ?~1135)과 김안(金安, ?~1135), 일자(日者) 백수한(白壽翰, ?~1135) 등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측근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묘청이 중앙 정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정지상의 노력 때문이었다는 점과 정지상 자신이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점을 볼 때, 서경 천도개경 귀족을 대신해 새롭게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지상 등이 묘청과 풍수지리설을 이용해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임완 등 서경 천도에 반대한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합리화하기 위해 서경 천도 세력이 내세운 풍수지리설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경 천도에 대판 비판이 인종이 천도에 소극적으로 돌아선 시기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인종서경 천도 세력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자주 순행하면서 천도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궁궐 공사가 한겨울에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이후 왕이 서경에 행차할 때마다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과 천재지변들이 속출했으며, 더욱이 그간 고려를 강하게 압박했던 금이 유화적으로 나오자 점차 천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대내외 정세를 파악한 서경 천도 반대 세력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강경하게 천도 반대 목소리를 높였으며, 묘청의 처형을 주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상적 측면을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고려 시대 유학자들이 점차 유학과 다른 사상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풍수지리설은 땅의 기운이 국가나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 신라 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후 도선(道詵, 827~898)이 그 이론을 확립하여 확산되었다. 풍수지리설은 그 자체에 신비적 속성으로 인해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신비적 성격의 도참사상과 결합하기 쉬웠으며, 이렇게 탄생한 풍수도참사상은 고려 시대 정치⋅사회⋅사상 일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태조 왕건(王建, 877~943)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풍수지리설과 연관된 유훈을 여럿 남겼는데, 이것은 도선에게 부여된 권위와 함께 풍수지리설이 고려 전 기간에 걸쳐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태조의 유훈이 풍수지리와 관련을 맺고 있는 한 고려의 유학자들이 풍수지리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고려 시대 유교는 이념적으로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중시하는 등 유동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 실용을 중시했던 고려 유학자들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였고,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노장사상⋅도교⋅풍수지리설 등 다양한 사상을 유학과 병립해서 함께 수용하는 기풍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풍수지리설의 경우 그 자체가 나름의 합리성과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행론(五行論)과 숙명론 등 사상적으로도 유학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 시대 유학자들의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풍수지리설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이 현실에 접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극적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인종묘청의 등장으로 정치적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강경해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은 유학과 다른 사상의 근본적 차이점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상소에서 임완은 묘청 등이 주장하는 음양론이 허망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묘청은 송나라의 임영소와 같이 그릇된 도술로써 왕을 현혹하고 대신들이 이에 따르고 있으므로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복을 구하기 위해 대화궁을 지었지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재이(災異)만 생기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거듭되는 재이는 왕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므로 왕이 스스로 반성하고 덕을 닦아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묘청 등의 주장과 같이 개경의 지기가 쇠했기 때문이 아니라 왕의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며, 재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불교의 법회, 도교의 제사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인 덕(德)으로써 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임완은 유교 덕치주의 사상에 입각한 왕도 정치를 주장하면서, 그 외의 사상인 불교, 도교, 풍수지리설 등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또한 태조와 풍수지리설에 대한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태조를 유교적 덕치 정치의 구현자로 상정해 모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고려 시대 유학자들 사이에 태조를 유학의 인정(仁政)의 구현자로 보는 의식이 강화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려의 시대사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병립하면서 상호 교류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임완의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고려 말 성리학자들이 유학만을 정학(正學)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상을 사교로 규정해 배척한 것과는 달리, 그것이 요구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즉, 서경 천도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천도 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풍수지리설을 비판할 필요성이 있었고, 비판에 있어서는 픙수지리설을 지지하는 여론과 이와 관련한 태조와 도선의 권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정교한 이론 전개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등장한 임완의 상소는 당시 유학자들의 현실 인식과 유교 정치사상의 특징을 보여 주는 의미 있는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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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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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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