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安珦)
이 학교가 나날이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양부(兩府)
로 보내어 거둬들인 베는 그대로 두고 이자만 받아서 섬학전(贍學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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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부와 밀직사의 합칭
에 다음과 같이 의론하였다. “재상의 직무로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우선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현고(養賢庫)
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식량 관련 일을 맡아 하는 관청
가 텅텅 비어 선비들을 기를 수 없습니다. 청컨대 6품(品) 이상은 각각 은(銀) 1근(斤)을 내게 하고 7품 이하는 베를 차등 있게 내도록 한 후, 이를 양현고(養賢庫)
'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식량 관련 일을 맡아 하는 관청' 관련자료
'양현고(養賢庫)' 관련자료
안향
의 건의에 따라 문묘의 제사 물품 마련과 유생의 생활비 지급을 돕기 위해 조성된 기금
으로 삼아야 합니다.” 양부가 이를 좇아 아뢰니, 왕이 내고(內庫)의 전곡(錢穀)을 내어 도와주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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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이 또 남은 돈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에게 주고 이들을 중국으로 보내어 선성(先聖)
의 생도로서 경전을 가지고 수업 받는 자가 별안간 수백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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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및 제자 70명의 초상을 그려 오게 하고 아울러 제기(祭器)악기, 6경(六經), 제자사서(諸子史書)를 구하여 오도록 하였다. 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
한 이산(李㦃),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를 삼았다. 이에 금내학관(禁內學館)
비서성⋅사관(史館)⋅한림원⋅보문각⋅어서원⋅동문원의 총칭
⋅내시(內侍)⋅3도감(三都監)⋅5고(五庫)의 학문하기를 원하는 선비, 7관(七管)
예종
때 국학(國學)에 설치된 7재(七齋)
12도(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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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들 가운데 선배에게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는 자가 있어 안향
이 노하여 장차 벌하려 하니 생도들이 사죄하였다. 안향
이 서약(誓約)하기를, “내가 그대들 보기를 마치 내 아들과 손자같이 하거늘 그대들은 어찌 노부(老夫)의 뜻을 깊이 새기지 아니하는가?” 하고 데리고 집에 가서 술자리를 열었다. 생도들이 서로 말하기를 “공께서 우리를 정성스레 대우함이 이와 같으니 만약 감화 받지 않으면 우리가 사람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중략)……
'안향'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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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는 항상 회암선생(晦庵先生)
6년 문묘에 종사(從祀)
이 비록 섬학전(贍學錢)을 두길 건의하긴 했지만 어찌 가히 이 일로써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지만 그 문생 신천(辛蕆)이 힘써 청하므로 마침내 종사가 이루어졌다.
주자(朱子)
의 초상을 걸고 우러러 사모하여 마침내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였다. 중국의 거문고 하나를 두고 선비 중 배울 만한 자를 만나면 매번 이를 권하였다. 충숙왕
'충숙왕' 관련자료
신위를 모시고 제사함
할 것을 의론하자 어떤 자가 말하기를, “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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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105, 「열전」18 [제신] 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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