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에 상제(喪制)가 문란하고 해이하여 사대부가 모두 100일이면 길복(吉服)
는 부모상(父母喪)에 홀로 묘에 여막(廬幕)을 짓고 애통함과 예를 갖추기를 모두 극진히 하였으므로 그 마을을 정표(旌表)
) 16년(1360)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다. 당시 경서(經書)로 우리나라에 온 것은 오직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는데, 정몽주
가 강의하고 설명함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그 후에 원나라의 유학자인 호병문(胡炳文)이 지은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비교하니 정몽주
의 강설이 이와 모두 일치하므로 여러 유학자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이색(李穡)
은 정몽주
가 자유자재로 논리를 펴면서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고 극찬하면서 동방(東方=우리나라) 이학(理學)을 연 원조(元祖)라고 추천하였다. ……(중략)……
상기를 마친 뒤 입는 보통 옷
을 입었다. 정몽주(鄭夢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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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드러내어 알림
하였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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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훌륭했으며,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고 충효의 굳은 절의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태조(太祖)
가 평소 그를 중요하게 여겨 군사와 관련된 임무를 맡을 때마다 반드시 그와 함께 같이 갔으며, 여러 번 천거하여 벼슬이 함께 재상까지 올랐다. 이 무렵 국가에 변고가 많아 중요한 업무가 매우 많았는데 정몽주
가 큰일을 처리함에 있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모두 적절하게 해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상제(喪祭)에서는 오직 불교의 가르침을 숭상하고 있었는데, 정몽주
가 처음으로 선비와 백성들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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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도성 안에 5부 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학을 일으켰다. 그 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수참(水站)
고려에서 조선 시대에 내륙 하천망을 이용한 물자 수송을 위해 설치한 역참
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일 등이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다.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豪放)하고 준결(峻潔)하며, 『포은집(圃隱集)』이 세상에 전한다.
『고려사』권117, 「열전」30 [제신]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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