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고려 시대성리학의 전래와 불교 비판

박초의 척불론

성균생원 박초(朴礎, 1367~1454) 등도 역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태조께서 창업하신 이래로 훌륭하신 왕족들께서 대대로 이어가면서 왕업을 망치지 않은 지 거의 500년이 되었습니다. ……(중략)…… 신들이 가만히 듣건대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야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부자(父子)가 있고, 부자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위아래가 있고, 위아래가 있은 후에 예의가 비로소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요, 고금의 떳떳한 법이므로 잠시라도 거기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만일 이를 없앤다면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바요, 해와 달이 비치지 않을 바요, 귀신이 죽일 것이요, 천하 만세의 공론(公論)이 같이 베어 죽일 바입니다.

저 부처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대를 이어야 할 적자로서 그 아비를 떠나 부자의 친분을 끊고, 필부(匹夫)로서 천자에 항명하여 군신의 의(義)를 멸하며, 남녀가 집에 사는 것을 도가 아니라 하고, 남자가 밭 갈고 여자가 베를 짬을 불의(不義)라 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도를 끊고 의식의 근원을 막아 버리면서 (부처의) 도를 가지고 천하를 바꾸는 일을 생각하려 합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한다면 100년 후에는 인류가 끊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운행하는 하늘과 아래에서 싣고 있는 땅 사이에 나고 자라는 것은 오직 나무와 풀, 날짐승과 들짐승, 물고기와 자라, 용과 뱀에 불과할 뿐이니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는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대저 부처는 본래 오랑캐의 사람으로 중국과 언어가 같지 않고 의복이 다릅니다. 입으로는 선왕(先王)의 법언(法言)을 말하지 않고, 몸에는 선왕의 법복(法服)을 입지 않습니다. 부부와 부자, 군신의 윤리를 알지 못하고, 거짓으로 삼도(三途)를 말하고 그릇되게 육도(六道)를 주장합니다. 마침내 우매한 이들에게 망녕스럽게 공덕(功德)을 구하여 나라에서 금하는 바를 꺼리지 않고 가볍게 법을 어기도록 합니다.

또 삶과 죽음, 오래 살고 빨리 죽는 것은 자연에 의한 것이고, 위복(威福)과 형덕(刑德)은 임금이 주관하며, 빈부귀천은 노력하여 세운 공업(功業)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들은 거짓말을 꾸며 다 부처 덕분으로 하면서 임금의 권한을 훔치고 조물주의 힘을 멋대로 내세워 백성들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여 천하를 더러운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니 술에 취한 듯 살다가 꿈을 꾸듯 죽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 틈타 누각과 전각, 궁궐을 지어 부처를 섬기고 흙과 나무, 구리와 쇠로 장식하여 불상을 꾸미고 양인(良人) 남녀의 머리를 깎아 그곳에 살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걸왕(桀王)의 선궁(璇宮)⋅상랑(象廊)과 주왕(紂王)의 경궁(瓊宮)⋅녹대(鹿臺)와 초(楚)나라 영왕(靈王)의 장화대(章華台)와 진시황제의 아방궁(阿房宮)도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니 그 재원이 어찌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슬프도다. 그 누가 이를 바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윗사람이 자신의 덕을 닦고 아랫사람들을 가르쳐서 예의를 밝혀 백성들에게 하늘의 이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만든 연후에야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널리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신라 말부터 불법을 받들어 백성들이 사는 마을까지 그 탑묘(塔廟)가 즐비했습니다. 불씨(佛氏)의 설이 귀에 가득 차고 넘쳐 피부에 스며들고 골수(骨髓)에 사무쳐, 의리(義理)로서 깨우칠 수 없고 어떤 말로도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처음 후삼국을 통일했을 때 깊이 그 쌓인 폐단을 경계하여 후대 임금과 신하들이 사사로이 원찰(願刹)을 세우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대사(大師) 최응(崔凝)이 불법(佛法)을 없앨 것을 청하였지만 태조께서는 “신라 말에 불씨(佛氏)의 설이 사람들에게 깊이 받아들여져 사람들마다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이 모두 불씨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제 삼한(三韓)이 겨우 통일되어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만일 급히 불씨를 없애면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훈요를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신라가 불사를 많이 일으켜 이 때문에 망했음을 마땅히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 하셨으니, 태조께서 후세에 내리신 훈요는 그 뜻이 지극히 깊고 절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대 임금과 신하들은 성조(聖祖)께서 남기신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옛 관습에 따라 임금마다 구차하게 암자를 짓고 탑을 세웠으며 지금은 그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중략)……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요순(堯舜) 삼대(三代)의 흥한 바를 본받으시면서 제(齊)⋅진(陳)⋅양(梁)⋅소(蕭)의 망한 까닭을 거울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위로는 성조(聖祖)께서 남긴 뜻을 잇고 아래로는 우리 유학자들의 평소 희망을 받아들여, 저 불자(佛者)들을 향리로 돌려보내는 한편 이들을 병역과 부역에 충당하고 절을 집으로 만들어 호구(戶口)를 늘려야 할 것입니다. 그 책을 불살라 영원히 그 근본을 끊고 나라에서 절에 주었던 전토(田土)는 군자시(軍資寺)가 주관하게 하여 군량을 채우고, 소속된 노비는 도관(都官)이 맡게 하여 각 관사에 나눠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상(銅像)과 동기(銅器)는 군기시(軍器寺)에 보내어 갑옷과 무기를 수리하게 하고 쓰던 그릇들은 예빈시(禮賓寺)에 보내 각 관사와 관리들에게 나눠주면 됩니다. 이후 예의로써 가르치고 도덕으로써 기르면 몇 년 되지 않아 백성의 뜻이 정해지고 교화가 이루어져 창고가 차고 나라의 재정이 충족될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과 아비를 등지고 인륜을 파괴하고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던 자들이 장차 오랫동안 물들었던 더러움을 버리고 타고난 양심을 일으켜 부자와 군신의 윤리를 알게 되고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를 짜서 생활을 꾸리면서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배를 두드리며 그 즐거움을 누릴 테니, 훌륭한 다스림이 가져올 풍요로움은 삼대(三代)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나라와 당나라를 앞지르게 될 것입니다.

또 이제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인 김전(金琠)은 자질도 없고 무지하면서도 임금의 뜻에 아첨하고 명령에 순응하여 옳고 그름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아버지와 임금이 없는 종교를 일으키고 고금 성현의 도를 폐하려 합니다. 그는 태조께서 개국하신 것은 모두 부처의 힘 덕분이라 여기고 부처를 배척하는 자를 태조의 죄인이라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덕은 하늘과 인심에 순응하여 요순(堯舜)과 같이 행하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삼한(三韓)의 백성들은 그 위엄을 큰 우레와 같이 두려워하였고, 그 덕을 부모와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북위(北魏)와 같이 나라 안의 중[沙門]들을 모두 죽이고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처럼 불상을 녹여 돈을 만들더라도 저 승려들이 어찌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합하는 공을 이루시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겸대사성(兼大司成) 정도전(鄭道傳)은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의 연원을 발휘하여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학(道學)을 앞장서 부르짖으며 불교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속이고 꾀어온 것을 물리치고 삼한(三韓)의 오랫동안 이어져 온 미혹을 깨뜨렸습니다.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였으며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東方)의 진정한 유학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이는 하늘이 전하께 중국의 고요(皐陶)와 이윤(伊尹)⋅부열(傅說)과 같은 훌륭한 신하의 도움을 주어 중흥의 때에 요순(堯舜)과 삼대(三代)의 융성함을 일으키게 하려는 뜻입니다. 전하께서는 정도전의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조종(祖宗)의 죄인으로 삼으시겠습니까, 김전이 부처를 숭봉하는 설(說)을 전하의 충신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신 등은 역시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정도전의 올바른 학문을 의심하고 김전의 사설(邪說)을 믿는다면 어찌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만세(萬世)에 비웃음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들이 감히 말하는 까닭이니, 다스림의 근본이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개 인심의 향함이 바르지 않으면 그 근본이 망하니 비록 일의 말단에 열심히 힘쓰더라도 모두 구차할 뿐입니다. 근원은 깨끗하지 않은데 흐름이 맑은 것은 있지 않으며 또한 뿌리가 굳건하지 않은데 가지가 무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들은 오직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일만이 인심(人心)의 근본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 이렇게 상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틈틈이 특별히 이 점을 유념하시어 시행하시면 비단 오늘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길이 만세에 칭송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신들의 말을 거짓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면 신들은 다시 전하를 위하여 치도(治道)의 만분의 일이라도 아뢰겠나이다.” 상소를 올리자 왕이 크게 노하였다.

『고려사』권120, 「열전」33 [제신] 김자수

成均生員朴礎等, 亦上䟽曰. 伏惟國家, 自聖祖創業以來, 金枝玉葉繼繼承承, 無墜厥緖者, 幾五百年于玆矣. ……(中略)…… 臣等竊聞, 有天地然後, 有萬物, 有萬物然後, 有男女, 有男女然後, 有夫婦, 有夫婦然後, 有父子, 有父子然後, 有君臣, 有君臣然後, 有上下, 有上下然後, 禮義有所措. 此天下之達道, 古今之常經, 不可須臾離也. 苟或廢焉者, 則覆載所不容, 日月所不照, 鬼神所共殛, 天下萬世公論之所共誅也.

彼佛何人也, 以世嫡而叛其父, 絶父子之親, 以匹夫而抗天子, 滅君臣之義, 以男女居室爲非道, 以男耕女織爲不義, 絶生生之道, 塞衣食之源, 欲以其道, 思以易天下. 信如此焉, 則百年之後, 人類絶矣. 天行乎上, 地載乎下, 其所以生育於其閒者, 惟草木⋅禽獸⋅魚鼈⋅龍蛇而止爾, 三綱五常之道, 竟何寓其於閒哉.

夫佛本夷狄之人, 與中國言語不類, 衣服殊制. 口不言先王之法言, 身不服先王之法服. 不知夫婦⋅父子⋅君臣之倫, 僞啓三途, 謬張六道. 遂使愚迷, 妄求功德, 不憚科禁, 輕犯憲章. 且生死壽夭, 由於自然, 威福刑德, 關之人主, 貧富貴賤, 功業所招. 而愚僧矯詐, 皆云由佛, 竊人主之權, 擅造化之力, 塗生民之耳目, 溺天下於汚濁, 醉生夢死, 不自覺也. 是以, 築樓殿宮閣以事之, 飾土木銅鐵以形之, 髡良人男女以居之. 雖桀之璇宮象廊, 紂之瓊宮鹿臺, 楚靈之章華, 呂政之阿房, 不加也, 是豈不出乎百姓之財力歟. 嗚呼痛哉, 其誰正之. 必也上之人, 德修於己, 敎成於下, 以明禮義, 使斯民知天理之所在, 然後可以正之矣.

洪惟我東方, 自新羅之季, 奉浮屠之法, 至於閭里, 比其塔廟. 佛氏之說, 洋洋乎盈耳, 淪於肌膚, 浹於骨髓, 未可以義理曉也, 亦未可以口舌辨也. 惟我太祖, 綂三之初, 深懲積弊, 禁後代君臣, 私立願刹. 於是大師崔凝, 請除佛法, 太祖以爲, 新羅之季, 佛氏之說, 入人骨髓, 人人以爲死生禍福, 悉佛所爲. 今三韓甫一, 人心未定, 若遽革佛氏, 必生駭心. 乃作訓曰, 宜鑑新羅, 多作佛事, 以至於亡, 然則太祖之垂訓於後世者, 至深切矣. 歷代君臣, 不能體聖祖之遺意, 因循苟且, 營菴立塔, 無代無之, 式至于今, 其弊滋甚.. ……(中略)……

伏惟殿下, 法堯舜三代之所以興, 鑑齊⋅陳⋅梁⋅蕭之所以亡. 上繼聖祖之遺意, 下副吾儒之素望, 使彼佛者, 勒還其鄕, 入其人, 以充兵賦, 廬其居, 以增戶口. 焚其書, 以永絶其根本, 所給之田, 使軍資主之, 以贍軍餼, 所屬奴婢, 使都官掌之, 以分各司各官. 其銅像銅器, 屬於軍器寺, 以修甲兵, 其所用器皿, 屬於禮賓寺, 以分各司各官. 然後敎之以禮義, 養之以道德, 不數年閒, 民志定而敎化行, 倉廩實而國用周. 然則向之背君父毁人倫逆天理者, 將去其舊染之汚, 以發其秉彝之良心, 知父子君臣之倫, 知夫夫婦婦之道. 男耕女織, 以生其生, 含哺鼓腹, 以樂其樂, 致理之豐, 可以肩三代, 而軼漢⋅唐矣.

且今佞臣金琠, 以不肖之資, 無知之見, 阿意順旨, 變亂是非, 欲興無父無君之敎, 以廢古今聖賢之道, 以爲, 太祖開國, 皆蒙佛力, 指闢佛者, 爲太祖之罪人, 太祖, 聖德神功, 順乎天, 而應乎人心, 同堯舜行, 法湯武, 三韓之民, 其畏威也, 如雷霆, 其懷德也, 如父母, 雖盡誅境內沙門如元魏, 盡鑄佛像爲錢如周世宗, 彼佛者, 安能使太祖, 不能成綂合三韓之功乎. ……(中略)……

兼大司成鄭道傳, 發揮天人性命之淵源, 倡鳴孔⋅孟⋅程⋅朱之道學, 闢浮屠百代之誑誘, 開三韓千古之迷惑. 斥異端, 息邪說, 明天理, 而正人心, 吾東方眞儒, 一人而已. 是上天授殿下以皐陶⋅伊⋅傅之佐, 以興堯舜⋅三代之盛於中興之日也. 殿下以道傳闢佛之策, 爲祖宗之罪人歟, 金琠奉佛之說, 爲殿下之忠臣歟, 臣等亦未敢知也.

殿下疑道傳之正學, 信金琠之邪說, 則豈不取笑於天下, 見譏於萬世哉. 此臣等所以敢言也, 爲理之本, 捨正人心, 何以哉. 盖人心之趨向不正, 則其本亡矣, 雖有屑屑於事爲之末, 皆苟而已. 未有源未潔而流淸者也, 亦未有本未固而末茂者也.

故臣等獨以闢異端, 爲正人心之本, 獻焉. 伏惟殿下, 萬機之暇, 特留宸念, 擧而行之, 非特當今之幸, 抑亦永有辭于萬世矣. 若殿下, 以臣等之言, 勿以爲迂, 採而納之, 臣等更爲殿下, 陳理道之萬一. 䟽上, 王大怒.

『高麗史』卷120, 「列傳」33 [諸臣] 金子粹

이 사료는 1391년(공양왕 3년) 5월 당시 성균생원으로 있던 박초(朴礎, 1367~1454) 등이 올린 척불 상소로, 불교를 말살하고 요순(堯舜)의 정치를 모범으로 하면서 왕조 중흥의 정치를 펼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당시 성균생원으로 있던 윤향(尹向)⋅한고(韓皐)⋅허지(許遲)⋅김권(金綣)⋅이자찬(李子撰) 등 15명이 함께 상서한 것이기도 하여, 이들이 유불의 공존이 아닌 불교=이단, 유교=천하의 도로 분명하게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안향(安珦, 1243~1306)⋅백이정(白頤正, 1247~1323)⋅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이곡(李穀, 1298~1351)⋅이색(李穡, 1328~1396) 부자,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등으로 이어지는 주자 성리학의 수용과 그에 따른 윤리 도덕의 실천 운동이 주류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에 대한 공부를 강조하였으며, 도덕적 자기 수양으로서의 수기(修己)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행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군주의 성학(聖學) 강화 등을 통해 왕조의 개혁과 중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특히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대 이후 급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불교계의 타락과 폐단을 주목하고 그 개혁을 넘어 불교의 배척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불론의 전개 양상은 당시 성리학자로 일컬어지는 이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먼저 안향이나 이제현이색 등은 부처를 대성인이자 지성(至聖) 지공(至公)의 존재로 보고 불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다만 사찰이 함부로 설치되고 자격 없는 승려들에 의해 불교가 타락하는 현실의 폐단 개혁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색은 부친인 이곡의 유지를 이어 여주 신륵사에 대장경 봉안을 주도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온건론적 불교 개혁의 입장은 1390년(공양왕 2년)과 1391년 사이에 배불⋅척불 상소가 잇따르면서 약화되었고, 불교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로까지 전개되었다. 먼저 정몽주는 1390년 경연에서 유학의 실천윤리의 효용과 유자의 도, 요순의 도를 행할 것을 천명하면서, 불교는 친척을 떠나고 남녀 관계를 끊으며 홀로 바위굴에 앉아 불도를 닦는 것을 종(宗)으로 삼고 있어 평상의 도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1391년(공양왕 3년) 천변 등 재앙이 잇따르자 조언을 구하는 공양왕의 조서에 답하여 도량 및 문수회(文殊會)의 설행 등으로 인한 재용의 낭비 문제를 제기하고, 불씨(佛氏)의 선(善)을 닦아 복(福)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결국 불(佛)을 섬기고 신(神)을 섬김은 이익이 없고 해만 있음을 말하였다.

한편 성균생원 박초 등도 불교에 대해 첫째로 부자⋅군신⋅부부 관계의 부정 및 남경여적(男耕女積)의 생산 활동을 막아 삼강오상의 도가 없어 인류가 끊어지기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로는 삶과 죽음, 장수와 요절, 위복(威福)과 형덕(刑德) 등이 부처에 의한 것이라 하여 자연과 임금의 공로를 부정하고 편안히 살고 있다며 비난하였다. 셋째는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훈요에서 ‘마땅히 신라가 불사를 많이 행하여 이로써 망함에 이르렀음을 거울로 삼으라’ 한 뜻을 절실하게 깨달아 불교를 점차 없앴어야 했다고 보았다. 넷째는 연복사 탑을 세우는 등의 일로 민심이 이반하고 재변이 생기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다섯째는 김전(金琠) 등이 ‘태조가 개국한 것은 모두 불력(佛力)에 힘입은 것이다’ 하고 부처를 배척하는 자를 태조의 죄인이라 하는 것은 큰 문제이며, 성현의 도를 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하였다. 여섯째는 태조의 전생 윤회설 등은 헛된 것이며, 덕을 닦지 않고 복만 구하려는 기이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박초 등은 결국 동중서⋅한자⋅정자⋅주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인륜을 밝히며 백성의 도적을 제거하여 요순의 도를 일으켜 중흥해야 함을 그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배불론을 제기한 정도전 등을 죄인으로 삼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를 거두어 이단을 물리치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근본을 바르게 할 것을 내세웠다.

또한 그는 불자(佛者)를 향리로 돌려보내 병사에 충당하고 조세를 부과하여 호구(戶口)를 더할 것, 그 책을 불살라 영원히 그 근본을 끊을 것, 급여한 전토(田土)는 군자시(軍資寺)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이로써 군량에 채울 것, 소속된 노비는 도관(都官)이 맡게 하여 이로써 각 사(司)와 각 관(官)에 나눌 것, 그 동상(銅像)과 동기(銅器)는 군기시(軍器寺)에 보내 쓰도록 할 것, 살림살이 그릇은 예빈시(禮賓寺)에 맡겨 활용토록 할 것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박초의 상소 내용은 같은 시기에 올린 김초(金貂, ?~?)의 상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출가한 무리들을 본업으로 돌려보낼 것, 오교와 양종을 깨뜨려서 군사로 보충하고, 서울과 지방의 사사(寺社)를 그곳의 관사에 나누어 소속시킬 것, 금령을 엄하게 세워 머리를 깎는 자는 죽이고 용서하지 말 것 등 과격한 불교 말살의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같은 배불⋅척불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주자 성리학의 심화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몽주정도전⋅박초⋅김초 등은 성리학을 천하의 도이자 정학(正學)으로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왕조 중흥을 위한 개혁을 추구하였고, 불교 무용론과 불교 말살론은 그와 궤를 같이하면서 단계적으로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박초 등의 척불 상소는 기존의 고려 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불교는 수신의 도, 유교는 치국의 도’라는 두 도의 공존이 더 이상 어려워졌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료라 할 수 있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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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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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의 정치사상 연구』, 도현철, 혜안, 2011.
『성리학 수용기 불교 비판과 정치⋅사상적 변용-정도전과 권근을 중심으로』, 이정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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