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고려 시대귀족 문화의 발달

중국인 눈에 비친 고려청자

○ 찻그릇

고려의 차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 없어 오직 중국의 납차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긴다. 하사 받은 것 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이를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고려인도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더욱 차 끓이는 용구를 만들게 되었다. 금화오잔(金花烏盞)비색소구(翡色小甌)은로탕정(銀爐湯鼎)은 모두 중국의 모양과 규격을 흉내 낸 것이다.

○ 도기 술병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병의 모양은 참외와 같은데, 위에는 연꽃 위에 오리가 엎드린 모양의 작은 뚜껑이 있다. 또 주발⋅접시⋅술잔⋅사발⋅꽃병⋅탕기⋅옥잔도 잘 만들었는데 이는 모두 중국의 그릇 만드는 법식을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생략한다. 다만 술병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다.

○ 도기 향로

산예출향(狻猊出香) 역시 비색인데,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있고 아래에는 봉오리가 벌어진 연꽃무늬가 위를 떠받치고 있다. 여러 그릇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옛 비색(秘色)이나 여주(汝州) 관요에서 새로 구워낸 청자와 대체로 유사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권32, 기명3

○ 茶俎

土產茶味苦澁, 不可入口, 惟貴中國臘茶幷龍鳳賜團. 自錫賚之外, 商賈亦通販, 故邇來頗喜飮茶, 益治茶具. 金花烏盞, 翡色小甌, 銀爐湯鼎, 皆竊效中國制度.

○ 陶尊

陶器色之青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 酒尊之狀如瓜, 上有小蓋, 面爲荷花伏鴨之形. 復能作盌⋅楪⋅桮⋅甌⋅花甁⋅湯⋅琖, 皆竊放定器制度, 故略而不圖. 以酒尊異於他器, 特著之.

○ 陶爐

狻猊出香, 亦翡色也, 上爲蹲獸, 下有仰蓮, 以承之. 諸器, 惟此物, 最精絶. 其餘則越州古祕色, 汝州新窯器, 大槩相類.

『宣和奉使高麗圖經』卷32, 器皿3

이 사료는 북송의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 ?~?)이 쓴 『고려도경』 중 청자에 관한 내용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즉 『고려도경』은 북송의 사신 서긍이 1123년(인종 1년) 6월 12일 개경에 들어와 7월 13일 귀국할 때까지 한 달 남짓 체류하면서 그 경과와 견문을 그림과 함께 엮은 사행 보고서이다.

12세기 전반의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인종(仁宗, 재위 1122~1146) 연간은 고려 귀족 문화의 전성기로, 순청자가 발전하여 고려만의 독특한 ‘비색 청자’가 만들어진 시기다. 이때 고려에 온 서긍이 『고려도경』「기명(器皿)」 편에 고려청자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는 고려청자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담은 사료로 그 중요성이 클 뿐 아니라 고려 청자가 당시 중국인 눈에 어떻게 비쳤으며, 어떻게 중국과 다르고,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우선 『고려도경』에 나타난 서긍의 고려 문화 인식 태도를 살펴보면, 선진적 중국 문화에 대한 우월감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가 개경에 다녀간 1123년은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기 4년 전이고, 고려는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다음 해였다. 당시 북쪽에서는 요(遼)와 금(金)이 북송을 압박하고 있었고, 서남쪽에서는 서하가 독립국으로 버티고 있었다. 북송은 고려와의 친선 관계를 통해 전통적 중화주의를 실현하는 동시에 정치적⋅군사적 지원을 얻어 요와 금을 견제하고자 했고, 고려는 북송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경제적 이득을 꾀하고자 하였다.

당시 송의 지배 세력인 사대부들은 중국을 선진 문화, 이민족을 후진 문화로 구분하고, 주변 민족을 중국 문화에 동화된 민족과 그렇지 않은 오랑캐로 철저히 구분하였다. 서긍 또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고려 문화를 관찰하였다. 그는 선진적 중국 문화가 고려에 유입되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고려 고유의 문화적 특수성을 함께 관찰, 기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긍의 눈에 비친 고려청자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비색(秘色)’과 구분되는 고려청자의 독자적 ‘비색(翡色)’에 주목하였다. 서긍은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12세기 고려청자를 비색 청자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의 비색이 월주(越州)에서 오월왕(吳越王)에게 공물로 자기를 바쳐졌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은 비색 자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는 의미로 비색(秘色)으로 불린 데 비해, 고려의 비색은 물총새 깃털과 머리 부분 색상, 즉 맑은 비취색으로 색상 자체를 의미한다. 즉, 중국 청자의 비색은 매우 귀중하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색상이라는 의미라면, 고려청자의 비색은 색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솔직히 표현한 것이다.

실제 고려청자의 비색이 밝고 맑고 명랑한 데 반해 중국청자의 비색은 진하고 탁하고 깊다. 보통 고려청자의 비색에 대해서는 북송 대의 『고려도경』과 남송 대의 『수중금(袖中錦)』을 반복 혹은 조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남송 태평노인의 『수중금』에는 “건주⋅촉 지방의 비단, 정요 백자, 절강의 차, 고려 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모방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하여 천하의 명품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하였다. 특히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북송의 여관요(汝官窯) 청자의 비색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는 점에서 이러한 평가는 매우 의미가 깊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중국인의 눈에도 천하제일이라 할 만큼 독자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인들은 청자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대해 긍지와 애착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자의 발색은 유약과 바탕흙의 환원 과정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것으로 철분의 함유량, 유약의 성분, 태토(胎土)의 성분, 가마의 제반 분위기, 가마내의 위치, 화도의 변이, 때는 나무의 차이, 불을 때는 기술, 바람의 부는 방향과 강도 등에 따라 미묘한 변화를 보인다. 따라서 고려청자의 독특한 비색은 일시적 모방이나 추종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쌓인 고려의 기술과 미감이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중국 청자의 영향에서 벗어난 고려만의 독자적 문양과 형태의 청자가 나타났다. 사료에서 서긍은 참외 모양 술병과 사자 모양 향로에 대해서는 그 모양이 특이하고 독특한 비색을 가지고 있다고 한 반면, 자신이 관찰한 나머지 청자들은 중국의 것과 유사하거나 중국 월주요(越州窯)와 여관요의 비색을 가졌다고 하였다.

고려청자는 중국에서 전래하였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때 원시적 유약 도기가 제작된 이래 오대와 송에 이르면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청자가 생산되었는데, 월주요⋅여관요와 같은 가마에서 생산된 청자들이 대표적이다. 삼국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래된 중국 청자는 10세기경 중국 남방 월주요계 요업 기술이 직접적으로 유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세기 말이나 12세기 전반이 되면 여관요 청자 등 중국 남⋅북방 지역의 다양한 형식의 청자가 사신이나 상인들의 왕래를 통해 국내에 알려져 수입되었다. 이는 당시 고려 귀족들의 중국 도자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음을 보여 주며, 이러한 영향으로 월주요와 여관요의 비색을 가진 청자들이 고려에서도 많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기에는 국내에서 청자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중국적 요소가 약화되고 고려만의 특징이 드러나는 청자들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아직 청자에 상감 기법을 도입하기 전이었지만, 장식 면에서는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 순청자에 음각 기법으로 문양을 넣거나, 무늬를 돋을새김하거나 압출하는 양각 기법,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 청자 등이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조형미와 독창적 장식기법이 절정에 달한 것은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대로부터 인종 대에 이르는 시기였다. 서긍이 방문한 1123년은 바로 이러한 순청자(1050~1150)의 전성기로, 그가 보고 간 청자는 음각⋅양각의 순청자 혹은 원앙⋅오리⋅기린⋅사자⋅용⋅봉황⋅물고기와 표주박⋅죽순⋅연꽃⋅대나무⋅참외⋅복숭아 및 보살⋅스님⋅도사⋅동자 등과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 혹은 사람 모습을 조각한 상형 청자 등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고려만의 독창적인 형태와 문양, 색상을 가진 것들이었다.

이는 인종이 묻힌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1146년(의종 즉위년) 전후 무렵의 순청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청자가 강한 곡선의 변화, 완벽한 세부 처리와 좌우 대칭으로 위엄에 찬 느낌을 주는 반면, 고려청자는 은은한 비취색과 부드러움과 섬세하며 부드러운 선의 흐름, 장식과 형태의 절제로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세련미와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다.

셋째, 차 문화 확산이 청자 생산에 영향을 주었다. 서긍이 “근래에는 고려인들도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더욱 차 끓이는 용구를 만든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청자의 가마터에서는 차와 관련한 다완(茶碗) 같은 다구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9세기 후반 선종의 전래와 함께 차 문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차 마시는 용구로서 청자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기 시작했고, 고려가 건국된 10세기부터는 차가 승려나 문인의 벗이나 왕실이나 불교 교단의 각종 행사에 필수 품목으로 부상하면서 청자의 수요가 증대하면서 생산이 더욱 가속화하였다.

한편, 청자 제작 기술이 절정을 이루는 12세기 강진과 부안 일대 가마터에서는 고려 전기 주 생산품이었던 다완이나 제기 이 외에 정병, 향로 매병 등 특수 용기와 기와나 장식 타일 같은 건축용재 및 화장용구, 문방용품, 약 용품이 발견되고 있어, 점차 청자의 사용이 생활의 여러 부분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세기부터 활발히 생산되던 청자는 11세기로 가면서 점차 중국적 요소가 약화되었고, 12세 전반이 되면 고려만의 독특한 비색과 기품 있는 조형미로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평가 받는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다. 서긍은 이때의 청자를 『고려도경』에 남기고 있으며, 곧이어 고려에서 상감청자가 창안되면서 그의 기록은 고려청자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은 중국인의 눈에 비친 1123년 당시의 뛰어난 비색 청자의 모습을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의 문화와 자기」,『고려귀족사회의 형성』,이기백,일지사,1990.
「푸른 옥으로 핀 꽃,천하제일의 고려청자」,『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장남원,청년사,1997.
「고려청자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형성과정으로 본 조선 후기의 정황」,『미술사논단』29,장남원,한국미술연구소,2009.
「11세기말~12세기 전반 고려청자에 보이는 중국도자의 영향」,『미술사학』21,정신옥,한국미술사교육학회,2007.
「고려청자의 비색」,『정신문화연구』16,정양모,한국학중앙연구원,1983.
「고려도경에 보이는 기명」,『한국문화』6,최몽룡,규장각 한국학연구원,1985.
저서
『고려중기 청자 연구』, 장남원, 혜안, 2006.
편저
「고려 청자와 미술」, 최순우, 독서신문사 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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