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李寧, ?~?)은 전주(全州)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인종
때 추밀사(樞密使) 이자덕(李資德, 1071~1138)을 따라 송나라에 갔는데, 휘종(徽宗, 1082~1135)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왕가훈(王可訓)⋅진덕지(陳德之)⋅전종인(田宗仁)⋅조수종(趙守宗) 등에게 이령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하였다. 또 이령에게 고려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리도록 했다. 휘종은 (그가) 올린 그림을 보고는 “근래 사신을 따라온 고려 화공이 많았지만 이령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다”고 찬탄하며 술과 음식 및 화려한 비단옷과 명주실로 짠 비단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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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은 어려서 내전숭반(內殿崇班)
이 이준이를 불러 이령이 그린 산수화를 보이자, 이준이가 깜짝 놀라면서 “이 그림이 만약 다른 나라에 있었다면 저는 천금(千金)을 주고라도 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송나라 상인이 바친 그림을 본 인종
이 그 그림이 중국의 진귀한 작품이라고 기뻐하며 이령을 불러 자랑하니, 이령이 “이것은 저의 작품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인종
이 믿지 않자 이령이 그림을 받아 표구된 뒷면을 절개하니 과연 이령의 성명이 있었다. 그 후 왕이 그를 더욱 사랑하였다.
정7품 남반직의 우두머리
이준이(李俊異)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준이는 후배를 시기하여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있어도 추천하는 일이 드물었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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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대에 와서는 궁중의 그림 그리는 일은 모두 그가 주관하였다. 그의 아들 이광필(李光弼, ?~?)도 그림으로 명종
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문신들에게 소상팔경(瀟湘八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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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사람 송적(宋迪)이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 나오는 8가지 경치
에 대한 시를 짓게 한 후, 이광필에게 이를 그리도록 하였다. 왕이 그림에 정통한 데다 특히 산수화에 능해 이광필⋅고유방(高惟訪) 등과 함께 하루 종일 풍경 그리는 일에 빠져 나라의 중요한 일에 게을리 하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측근 신하들도 왕의 비위를 맞추느라 나랏일을 간단하게 보고하려고만 하였다. 이광필의 아들이 서경
정벌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대정(隊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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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6위의 종9품 지휘관
에 임명되자 정언(正言)
봉박과 간쟁을 담당한 중서문하성의 종6품 관직
최기후(崔基厚)는 “이 사람의 나이가 겨우 스무 살이니 정벌 당시에는 열 살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열 살 난 어린아이가 종군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왕이 최기후를 불러 “너만 남달리 이광필이 우리나라를 빛나게 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구나! 이광필이 없었다면 삼한(三韓) 그림의 맥이 거의 끊어졌을 것이다”라고 꾸짖었다. 그제야 최기후가 서명을 하였다.『고려사』권122, 「열전」35 [방기] 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