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여. 이 내 생활 어떠한가?
옛사람의 풍류에 미치겠는가, 그렇지 못한가?
세상에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나와 비슷한 사람 많겠지만
그들은 왜 자연에 묻혀 지내는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다 말인가?
몇 칸짜리 소박한 초가집을 푸른 시냇물 앞에 두고
나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한 속에서 자연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노라.
엊그제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석양 속에 피어 있고
푸른 버드나무와 향기로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구나.
칼로 마름질을 했는가, 붓으로 그려냈는가?
조물주의 신비로운 재주가 사물마다 야단스럽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기운을 끝내 못 이겨 소리마다 교태롭구나.
자연과 내가 한 몸이 되니, 흥겨움이 다르겠는가?
사립문 앞을 걸어도 보고 정자 위에 앉아도 보니,
천천히 거닐며 시를 나직이 읊조리는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한데
한가로움 속에서 느끼는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 없이 나 혼자로구나.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경치 구경 가자꾸나.
산책은 오늘하고 목욕은 내일하세.
아침에 산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하세.
이제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술잔을 세어 가며 마시리라.
화창한 봄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물을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잔에 스미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술동이가 비었거든 날더러 알려라.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술집에 술이 있는지 물어
어른은 지팡이 짚고 아이는 술동이 메고
시를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가 시냇가에 혼자 앉아
고운 모래 맑은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맑은 물을 바라보니 떠오르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
무릉도원이 가깝구나. 저 들판이 그곳인가?
소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에 진달래꽃을 붙들고
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수많은 촌락이 곳곳에 벌어져 있네.
안개와 노을, 빛나는 햇살은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엊그제까지만 해도 거뭇거뭇한 들에 이제 봄빛이 흘러넘치는구나.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소박한 시골 생활에도 헛된 생각 아니 하네.
아무튼 평생 누리는 즐거움이 이 정도면 만족스럽지 아니한가.
「상춘곡」
이 몸이 태어날 때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이 또한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없다.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라 있었더니, 그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왔느냐?
내려올 때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3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지만 누구를 위하여 곱게 단장할꼬?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구나. 더웠다 서늘해졌다 하는 계절의 바뀜이 때를 알아 지나갔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오니, 듣거니 보거니 하는 가운데 느낄 일이 많기도 하구나.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가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담담한데, 그윽하게 풍겨 오는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에 달이 따라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껴 우는 듯 반가워하는 듯하니,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다. 그러면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생각하실꼬?
원앙새 무늬가 든 비단을 베어 놓고 오색실을 풀어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임의 옷을 만들어 내니, 솜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격식도 갖추었구나.
산호수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담아 앉혀 두고, 임에게 보내려고 임 계신 곳을 바라보니, 산인지 구름인지 험하기고 험하구나. 천 리 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누가 찾아갈꼬? 가거든 열어 두고 나를 보신 듯이 반가워하실까?
하룻밤 사이의 서리 내릴 무렵에 기러기 울며 날아갈 때, 높다란 누각에 혼자 올라서 수정 알로 만든 발을 걷으니,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북극성이 보이므로, 임이신가 하여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저 맑은 달빛을 일으켜 내어 임이 계신 궁궐에 부쳐 보내고 싶다. 누각 위에 걸어 두고 온 세상을 비추어, 깊은 산골짜기에도 대낮같이 환하게 만드소서.
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 생기가 막혀, 흰 눈이 일색으로 덮여 있을 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의 날아감도 끊어져 있다. 소상강 남쪽 둔덕도 추위가 이와 같거늘, 하물며 북쪽 임 계신 곳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따뜻한 봄기운을 부치어 내어 임 계신 곳에 쐬게 하고 싶다. 초가집 처마에 비친 따뜻한 햇볕을 임 계신 궁궐에 올리고 싶다.
붉은 치마를 여미어 입고 푸른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려 해는 저물었는데 밋밋하고 길게 자란 대나무에 기대어서 이것저것 생각함이 많기도 많구나. 짧은 겨울 해가 이내 넘어가고 긴 밤을 꼿꼿이 앉아, 청사초롱을 걸어둔 옆에 자개로 수놓은 공후라는 악기를 놓아 두고, 꿈에서나 임을 보려고 턱을 바치고 기대어 있으니, 원앙새를 수놓은 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이 밤은 언제나 샐꼬?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맡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고 다니다가 향기가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려 하노라.
「사미인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