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사람은 유용한 사물이 아닌 것이 없으니, 공연히 경적(經籍)만을 지켜서는 안 된다. 학문이란 것은 양심(養心)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 없으니, 글의 뜻에만 치우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와 같은 것은 실용적 학문이니, 음악(音樂)은 마음을 다스리어 방심하여 버리지 않게 한다.
또한 때때로 활쏘기를 익혀 그 덕(德)을 바르게 하고, 때때로 말 타기를 하여 그 뜻을 펴며, 때때로 예(禮)를 익혀 그 의식을 정제하고, 때때로 글씨를 쓰고 산수를 하여 그 심획(心劃)을 바르게 하고, 그 심수(心數)를 정밀하게 할 것이니, 이는 모두가 서로 힘입고 서로 도와 한 가지 일에도 게으름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를 여러 곳에 시험하되 한 시각이라도 혹시 중단이 없게 하며 한 시각이라도 혹은 방심이 없게 하여 마음을 기르지 않은 것이 없고, 학문을 하는 까닭이 아닌 것이 없고 기예를 익히는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한다면 땔 나무를 지고 오거나 물을 기른다[船柴運水]고 하더라도 심학(心學)
의 방법이 아닌 것이 없다.
'심학(心學)' 관련자료
사람과 사물이 각각 다른 것은 태어날 때의 성(性)인 것이요, 하나같이 같은 것은 하늘의 성(性)인 것이다. 물(物)의 형체가 다르다는 것에 있어서는 태어난 성(性)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하늘의 성체(性體)로 통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그 기(器)가 치우치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체(體)가 같은 것은 한결같이 하늘의 성(性)인 것이며, 그 태어난 성(性)의 구별이 있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니, 그 그릇이 온전하기 때문인 것이다.
【맹자가 생(生)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이른 것으로 개나 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만 정자와 장자가 기질(氣質)의 바탕[質]으로 사람의 성(性)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각각 다른 것은 기(氣)의 끝이요 한결같이 같은 것은 성(性)의 근본인 것이다. 태어나면서 품부(稟賦)한 것이 아름답거나 악한 것은 생(生)의 기(氣)가 다른 때문이고 그 본원(本原)이 순수한 것은 품부하는 데에는 매이지 않는 것이다.
생(生)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이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품(人稟)이 어둡고 밝거나 강하고 약한 것은 기(氣)인 것이니, 기(氣)를 성(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자는 논하기를, “개나 소의 기질이 다른 것은 형체다”라고 하였으니, 형체를 성(性)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고자(告子)가 이 기(氣)를 주장한 것이 변하여서 그 성체(性體)를 통하는 까닭에 한결같이 그 성(性)만을 주장하였고, 그 생품(生稟)에 관계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체는 변하여 그 성(性)과 같게 하지 못하는 까닭에 그 태어난 성(性)은 각각 다르고 같지 않은 것이다.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과 우(憂)⋅사(思)⋅여(廬)⋅경(警)은 사람의 마음에 이를 가진 것이니, 모두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어둡고 지극히 완고하여 사리에 어두운[頑冥] 사람일지라도 때로 발(發)하여 나아가게 하면 힘쓰지 않아도 유연(油然)해지는 것은 이것이 무릇 이 마음을 지닌 자는 한결같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대개 어리석고 완악(頑惡)한 것이 극도에 달하고 극히 완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자는 다만 혹 기질에 구애되거나 또한 못된 습성에 젖었는 데에다 더욱 자기 이해의 사사로움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래 지닌 원체(元體)가 드러나는 바가 없어 혹은 다 같이 완전히 없어짐과 같은 편이 있으나, 이해가 그다지 크게 관련되지 않는 곳에서는 미처 모르는 순간에 튕겨 나올 때도 있는 것이다. 옛날의 양설(羊舌)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악한 인물
이나 석생(石生)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악한 인물
과 같은 악(惡)한 자들은 그 품부한 기(氣)가 악한 것인데, 이는 그 기가 비록 극히 악하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이라면 오직 그것이 유연하게 발하는 일단(一段)만은 또한 성인과 더불어 같은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라면 비록 지극히 악한 품기(稟氣)와 지극히 흉측한 습행(習行)일지라도 오직 이 일단만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에게 이를 구한다 하더라도 나와 다를 것이 없으며, 뒷사람에게 이를 구한다 하더라도 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며, 비록 오랑캐[夷狄]일지라도 다르지 않고, 비록 금수(禽獸)일지라도 오히려 마음을 지닌 것이라면 또한 모두가 한 길[一路]의 밝은 곳이 있을 것이며, 혹은 발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다만 오랑캐는 품기가 주로 악하고 금수는 완전히 막혀서 통할 만한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理)는 더욱이 어린아이에게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니, 한 살배기나 두 살배기의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는 아이에게도 꾸짖으면 울고 사랑하면 따르며 일을 저지르면 부끄러워하고 꾀는 데가 있으면 혹은 배척하여 따르지 않으며 우는 것을 보면 서러워하게 되니, 그 정념(情念)이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발하는 것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물의 이해와 득실(得失)에는 비록 아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심려(心慮)가 전일(專一)하고 간이(簡易)하기 때문에 감응되기가 쉬우며, 유연하게 풀리는 참됨은 많고 완연하게 되는 악함은 적은 것이다. 비록 그 사이에 혹 기품이 같지 않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본연의 참된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性)의 착한 것이며 마음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성인(聖人)의 학문은 『대학(大學)』에 있고 성인의 법전은 『춘추(春秋)』에 있으며, 성인의 뜻을 기술하고 두 경서의 도(道)를 밝힌 것은 『맹자(孟子)』 일곱 편에 비할 만한 것이 없다.
맹자가 심성설(心性說)을 논한 것은 고자편(告子篇)과 진심편(盡心篇)에 이르러 이를 아주 잘 말하였는데, 양혜왕편(梁惠王篇)과 같은 곳에서는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과 백성과 함께 같이 좋아하고 미워한다”라고 말하였고, 공손추편(公孫丑篇)에는 “왕도(王道)
는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매 편마다 모두 이와 같으니, 모두가 이 한 가지 뜻인 것이다.
'왕도(王道)' 관련자료
주자(朱子)의 학문은 그 설이 또한 어찌 일찍이 선(善)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치지(致知)의 학(學)만이 그 공부가 우직하고 완급한 구별이 있어서 그 체(體)에는 나뉘고 합해지는 간격이 있었을 뿐이나, 그 실은 다 같이 성인의 학을 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일찍이 착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뒤에 와서 배우는 이는 허다히 그 근본은 잃고 오늘날의 학설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빌리는 것이요, 주자를 빌릴 뿐만 아니라 곧 주자를 부회(傅會)함으로써 그 뜻을 성취하고 주자(朱子)를 끼고 위엄을 지어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이다.
『하곡집』권9, 존언 하, 학문자양심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