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자전』에, “신두법(神痘法)은 대체로 두즙(痘汁)을 코에 넣고 호흡하면 당장 솟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항상 묘한 방법이 있는데도 우리나라에는 전해 오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섭섭하게 생각하여 왔다.가경(嘉慶)
23) 가을, 복암(伏菴)
청 인종의 연호
기미년(1799,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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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李基讓)의 호
이 용만(龍灣)
의주
에서 돌아왔는데
【이때 의주 부윤으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의 장자 창명이, “의주 사람이 연경에 들어가 종두법을 적은 책을 구해 가지고 왔는데, 몇 장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하므로 급급히 구하여 보았는데 그 방법의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천연두(天然痘)가 잘 된 자의 딱지 7, 8개를
【작은 것은 10여 개,】
자기(磁器) 종지에 넣고 손톱으로 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견고한 물체, 즉 칼자루 같은 것으로 으깨어 즙액을 만들되 진하지도 않고 묽지도 않게 한다. 너무 진하면 천연두 기운이 발생하지 못하고 묽으면 천연두 기운이 지나치게 손실된다. 다시 새솜
【누에고치 솜이다.】
을 대추씨 크기만큼 뭉친 다음 가느다란 실로 꽁꽁 매어 단단한 머리로 천연두의 즙액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데 남자에게는 왼쪽, 여자에게는 오른쪽으로
【좌우의 콧구멍】
한다. 가령 자정(子正)에 넣었다면 오정(午正)에 뽑아 버린다. 매번 6시각
【반일(半日)】
이 지나면 이 기운이 장부에까지 통하고, 며칠이 지나면
【혹 2~3일, 혹 3~4일씩 그 솟는 것은 일정하지 않다.】
그 아이가 약간의 통증을 느끼며 턱 아래나 목 주위에 반드시 기핵(氣核)이 돋게 되는데 큰 것은 새알만 하니, 이것이 그 징험이다. 그리고 면부(面部)나 신체에 3, 4개의 두립(痘粒)이 발기되는데 많은 이는 십수 개가 되지만 관계없다. 며칠 못 되어 부어오르고 고름이 차며 아물고 딱지가 떨어진다. 혹 잡증(雜症)이 생기면 본과(本科)의 치료법에 따라 증세에 맞추어 약을 쓰면 힘들이지 않고도 백 사람 접종하면 백 사람이 다 살고, 천 명의 사람에게 접종하면 천 명의 사람이 다 살아 하나의 실패도 없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대의(大意)가 이러한데 지금 상세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경신년 봄에 마침 검서(檢書) 박초정(朴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
】
이 방문하여 이 책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우리 집에도 이 처방이 있는데 일찍이 내각(內閣)
의 장서(藏書) 중에서 보고 베껴 둔 것입니다. 그 책이 너무 간략하여 시행해 볼 수가 없었는데, 이제 이 책과 합하여 보면 아마 요령을 얻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돌아가서는 즉시 사람을 보내 자기 집의 소장본(所藏本)을 보내 왔는데 그것 역시 두어 쪽뿐이었다. 나는 두 책을 종합하여 일편(一篇)을 지으면서 간혹 뜻이 깊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약간의 주해를 달기도 하고, 아울러 술가(術家)의 올바르지 못한 설(說)은 모두 삭제해 버렸다.
【예를 들면 시술하는 날의 간지(干支)에 따라서 잡아 매는 실의 색깔을 다르게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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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완성되어 초정에게 부쳐 주었더니, 초정이 다시 나를 방문하여, “본서(本書)를 살펴보니 그 두종(痘種)이 한겨울에는 떨어진 지 15일이 경과되어도 접종(接種)을 하면 종두(鍾痘)가 발생되지만, 만일 한여름이라면 5, 6일만 경과하여도 이미 묵은 것이 되어 접종을 하여도 발생되지 않습니다. 지금 북경에만 두종이 있는데 만일 우리나라에 가져와서 접종을 하려면 한겨울에 북경에서 막 떨어진 딱지를 가지고 나는 듯이 달려오더라도 우리나라에 도착하게 되면 이미 묵은 것이
【이미 15일을 경과한다】
되어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어린이가 희소(稀少)하여 혹 두종이 중간에 끊기면 새 두종을 만들어야 하는데 반드시 잘된 것을 전번의 방법에 따라 얻어 내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3, 4번을 경과한 후라야 훌륭한 두종을 얻을 수 있고, 만일 한두 차례 경과된 것이 혹 잘못될 경우에는 그 증거가 종핵(鍾核)에 나타나는데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경과된 것은 종핵이 미소(微小)하고, 반드시 서너 번 경과된 것이라야 그 종핵이 분명하게 솟게 된다. 이것이 그 증거이다”
나와 초정의 의논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이때 초정은 영평현(永平縣)의 지현(知縣)이 되어 섭섭해 하며 부임하였다. 그 후 수십 일 만에 초정이 다시 와서 기뻐하며 나에게 “두종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므로, 내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니 초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영평현에 부임하여 이 일을 관리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이방(吏房)이란 자가 흥분하며 잘된 것 하나를 구하여 먼저 자기 아이에게 접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종핵은 비록 미소하였으나 종두는 잘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관노 아이에게 접종하고 세 번째로 제 조카에게 접종시키니, 종핵도 점점 커지고 종두도 더욱 훌륭하였습니다.”
이에 의사(醫師) 이씨(李氏)라는 이를 불러 처방을 주어 두종을 가지고 경성 이북 지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더니 선비 집안에서 많이들 접종하였다고 한다.
이 해(1800, 정조
24) 6월에 건릉(健陵)
이 승하하였다. 다음 해 봄에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정은 경원(慶源)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간사한 놈이 의사 이씨를 모함하여 시의(時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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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사옥을 가리킴
로 무고하니 의사 이씨가 고문 받아 거의 죽게 되고 두종도 단절되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정묘년(1807, 순조
7)에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상주에 있는 의사가 종두를 접종하는데 100명 접종하여 100명이 완치되어 큰 이익을 얻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생각건대 그 처방이 영남에서 다시 유행하였던 모양이다. 내가 편집한 본방(本方)을 환난 중에 잃어버렸으므로 여기에 전말을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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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경의 모든 종두하는 의사는 각기 전담된 구역이 있어서 갑(甲) 구역의 의사가 몰래 을(乙) 구역에 가서 종두를 하면 을 구역의 의사가 관청에 송사를 제기하여 그 죄를 다스립니다”
『여유당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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