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
으로 족히 예악을 제정할 수 있고, 양화(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2)
해서 만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를 해서 되겠는가.
옛것을 본받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왕망(王莽)의 『주관(周官)』1)
1)
『주례(周禮)』를 말한다.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B.C. 45~A.D. 23)은 주공(周公)의 선례를 들어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면서 주공이 지었다는 『주례』에 근거하여 각종 개혁을 시도했으나, 시대착오적인 개혁으로 혼란을 초래하여 민심을 잃고 농민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왕망이 집권할 때 그에게 아부하기 위해 유흠(劉歆)이 비부(秘府)에 소장되어 있던 『주관』을 개찬(改竄)하고 『주례』로 이름을 고쳐 유가 경전의 하나로 격상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2)
양화는 이름이 호(虎)이며, 춘추시대 노(魯)나라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었다. 공자(孔子)가 그와 얼굴이 비슷한 탓에 진(陳)나라로 가던 도중 광(匡) 땅에서 양화로 오인받아 곤욕을 당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창신(刱新)
가 국가 재정에 중요한도량형기(度量衡器)
을 종묘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창신’을 해서 되겠는가.
새롭게 창조함
’은 어떠한가. 창신을 하여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세 발(丈)되는 장대 3)
3)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상앙(商鞅)이 자기가 만든 법령을 공포하기에 앞서 백성이 이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도성 남문에 세 발 되는 장대를 세워 놓고 이것을 북문에 옮겨 놓는 자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하여 이를 옮겨 놓은 자에게 약속대로 상금을 주었다.
길이⋅부피⋅무게를 재는 자⋅되⋅저울 등의 기구
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신성(新聲)4)
4)
이연년은 한나라 무제(武帝)가 총애한 이 부인(李夫人)의 오빠로, 노래를 매우 잘했으며, 신성, 즉 신작 가곡을 지었다. 그 덕분에 협률도위(協律都尉)까지 되었으나, 이 부인이 죽음에 따라 그에 대한 총애도 식어 결국에는 죄에 연좌되어 죽었다.
'종묘' 관련자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이가 있었으니 공명선(公明宣)5)
이 바로 그요,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이가 있었으니 회음후(淮陰侯)
5)
춘추시대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제자이다. 아래의 일화는 『설원(說苑)』과 『소학(小學)』 등에 나온다.
한나라 때 명장 한신(韓信)의 봉호
가 바로 그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공명선이 증자(曾子)에게 배울 때 3년 동안이나 글을 읽지 않기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제가 선생님께서 집에 계실 때나 손님을 응접하실 때나 조정에 계실 때를 보면서 그 처신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 문하에 머물러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니, 여러 장수가 불복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회음후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나와 있는데,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뿐이다. 병법에 그러지 않았던가? ‘죽을 땅에 놓인 뒤라야 살아난다’라고. ”
그러므로 무턱대고 배우지 아니하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혼자 살던 노(魯)나라의 남자요, 아궁이를 늘려 아궁이를 줄인 계략을 이어 받은 것은 변통할 줄 안 우승경(虞升卿)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물(靈物)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예에 대해서도 시비가 분분하고 악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어진 이는 도를 보고 ‘인(仁)’이라고 이르고 슬기로운 이는 도를 보고 ‘지(智)’라 이른다.
그러므로 백세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앞선 성인의 뜻이요6)
, 순임금과 우임금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 한 것은 뒷 현인7)
이 그 뜻을 계승한 말씀이다. 우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가 그 법도는 한가지요8)
, 편협함과 공손치 못함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 법이다.
6)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9장에 “군자의 도는 자기 몸에 근본하여 백성들에게 징험하며, 삼왕(三王)에게 상고하여도 틀리지 않으며,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앞선 성인은 공자를 가리킨다.
7)
맹자를 가리킨다.
8)
『맹자』이루 하(離婁下)에서 맹자는, 태평성대에 나랏일을 돌보느라 자신의 집을 세 번이나 지나치고도 들르지 않은 우임금과 후직, 난세를 만나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변치 않은 안회에 대하여 공자가 칭송한 점을 들면서 “우임금과 후직, 안회는 그 도가 같다[禹稷顔回同道]”라고 하였다. 또 같은 편에서 맹자는, 순임금과 문왕이 살던 지역이 서로 1000여 리나 떨어져 있고 살던 시대가 1000여 년이나 차이가 있어도 뜻을 얻어 중국에 시행한 것이 마치 부절(符節)을 합한 듯이 똑같음을 들어 “앞선 성인과 뒷 성인이 그 법도는 한가지이다(先聖後聖, 其揆一也). ”라고 하였다.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이 나이 스물셋으로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는데, 나를 따라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때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없애려고 노력하다 보면 혹 근거 없는 표현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내세운 주장이 너무 고원하다 보면 혹 상도(常道)에서 자칫 벗어나기도 한다. 이래서 명나라의 여러 작가9)
가 ‘법고’와 ‘창신’에 대하여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모두 정도를 얻지 못한 채 다 같이 말세의 자질구레한 폐단에 떨어져, 도를 옹호하는 데는 보탬이 없이 한갓 풍속만 병들게 하고 교화를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 ‘창신’을 한답시고 재주 부리기 보다는 차라리 ‘법고’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9)
명나라 때 이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 등 이른바 칠자(七子)들은 “산문은 반드시 선진(先秦) 양한(兩漢)을 본받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 ”라고 하면서 법고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반면, 원굉도(袁宏道) 형제 등 소위 공안파(公安派)들은 “성령을 독자적으로 표현하고 상투적 표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獨抒性靈, 不拘格套). ”라고 하면서 창신만을 일방적으로 추구하였다.
내 지금 『초정집』을 읽고서 공명선과 노(魯)나라 남자의 독실한 배움을 아울러 논하고, 회음후와 우후(虞詡)의 기이한 발상이 다 옛것을 배워서 잘 변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밤에 초정(楚亭)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침내 그 책머리에 써서 권면하는 바이다.
문장을 논하고 고경(古經)을 바루며 사람을 깨우치는 대목이 마치 구리 고리 위에 은빛 별 표시가 있어 안 보고 더듬어도 치수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글에는 두 짝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끊어진 벼랑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긴 강물이 되었다. “명나라의 여러 작가가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하나로 의견이 합치하지 못하고 말았다”라고 한 말은 편언절옥(片言折獄)10)
이라고 이를 만하다.
10)
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린다는 뜻으로,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는 “한마디 말로 옥사를 결단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자로(子路)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암집』권1, 서, 초정집서
- 『주례(周禮)』를 말한다.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B.C. 45~A.D. 23)은 주공(周公)의 선례를 들어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면서 주공이 지었다는 『주례』에 근거하여 각종 개혁을 시도했으나, 시대착오적인 개혁으로 혼란을 초래하여 민심을 잃고 농민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왕망이 집권할 때 그에게 아부하기 위해 유흠(劉歆)이 비부(秘府)에 소장되어 있던 『주관』을 개찬(改竄)하고 『주례』로 이름을 고쳐 유가 경전의 하나로 격상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 양화는 이름이 호(虎)이며, 춘추시대 노(魯)나라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었다. 공자(孔子)가 그와 얼굴이 비슷한 탓에 진(陳)나라로 가던 도중 광(匡) 땅에서 양화로 오인받아 곤욕을 당한 일이 있다.
-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상앙(商鞅)이 자기가 만든 법령을 공포하기에 앞서 백성이 이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도성 남문에 세 발 되는 장대를 세워 놓고 이것을 북문에 옮겨 놓는 자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하여 이를 옮겨 놓은 자에게 약속대로 상금을 주었다.
- 이연년은 한나라 무제(武帝)가 총애한 이 부인(李夫人)의 오빠로, 노래를 매우 잘했으며, 신성, 즉 신작 가곡을 지었다. 그 덕분에 협률도위(協律都尉)까지 되었으나, 이 부인이 죽음에 따라 그에 대한 총애도 식어 결국에는 죄에 연좌되어 죽었다.
- 춘추시대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제자이다. 아래의 일화는 『설원(說苑)』과 『소학(小學)』 등에 나온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9장에 “군자의 도는 자기 몸에 근본하여 백성들에게 징험하며, 삼왕(三王)에게 상고하여도 틀리지 않으며,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앞선 성인은 공자를 가리킨다.
- 맹자를 가리킨다.
- 『맹자』이루 하(離婁下)에서 맹자는, 태평성대에 나랏일을 돌보느라 자신의 집을 세 번이나 지나치고도 들르지 않은 우임금과 후직, 난세를 만나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변치 않은 안회에 대하여 공자가 칭송한 점을 들면서 “우임금과 후직, 안회는 그 도가 같다[禹稷顔回同道]”라고 하였다. 또 같은 편에서 맹자는, 순임금과 문왕이 살던 지역이 서로 1000여 리나 떨어져 있고 살던 시대가 1000여 년이나 차이가 있어도 뜻을 얻어 중국에 시행한 것이 마치 부절(符節)을 합한 듯이 똑같음을 들어 “앞선 성인과 뒷 성인이 그 법도는 한가지이다(先聖後聖, 其揆一也). ”라고 하였다.
- 명나라 때 이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 등 이른바 칠자(七子)들은 “산문은 반드시 선진(先秦) 양한(兩漢)을 본받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 ”라고 하면서 법고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반면, 원굉도(袁宏道) 형제 등 소위 공안파(公安派)들은 “성령을 독자적으로 표현하고 상투적 표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獨抒性靈, 不拘格套). ”라고 하면서 창신만을 일방적으로 추구하였다.
- 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린다는 뜻으로,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는 “한마디 말로 옥사를 결단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자로(子路)일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