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부(學部)에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치하다.
……중략……
세종
25년(1443), 임금이 모든 나라가 각각 글자를 만들어 나랏말을 적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만 글자가 없다며 친히 낱자 28자를 만들었으니, 언문(諺文) 또는 번절(反切)이라 불렀다. ……(중략)…… 이름을 훈민정음
(訓民正音)이라 했다.
'세종' 관련자료
'훈민정음' 관련자료
초성(初聲)과 종성(終聲) 여덟 글자는 ㄱ
【기역(其役)】
, ㄴ
【니은(尼隱)】
, ㄷ
【디귿[池末]】
, ㄹ
【리을(梨乙)】
, ㅁ
【미음(眉音)】
, ㅂ
【비읍[非]】
, ㅅ
【시옷[時]】
, ㆁ
【이응(異凝)】
인데 기(其), 니(尼), 디[池], 리(梨), 미(眉), 비(非), 시(時), 이(異)의 여덟 소리는 초성에 사용되고, 역(役), 은(隱), 귿[末], 을(乙), 음(音), 읍(邑), 옷[衣], 응(凝)의 여덟 소리는 종성에 사용되었다.
【말(末)과 의(衣)의 두 글자는 다만 그 글자의 뜻을 취하여, 단지 우리말로 소리를 삼는다.】
……(중략)……
중성(中聲) 열한 글자는 ㅏ
【아(阿)】
, ㅑ
【야(也)】
, ㅓ
【어(於)】
, ㅕ
【여(余)】
, ㅗ
【오(吾)】
, ㅛ
【요(要)】
, ㅜ
【우(牛)】
, ㅠ
【유(由)】
, ㅡ
【으, 응(應)에서 종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ㅣ
【이(伊)】
, ㆍ(丶)
【ᄋᆞ, ᄉᆞ(思)에서 초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데, 그 글자 모양은 옛날의 전자(篆字)와 범자(梵字)를 본떠서 사용했다. 여러 말소리를 이 문자로 적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두루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중략)……
그 뒤로 글 짓는 선비와 학자들이 언문(諺文)이라 부르며 훈민정음
을 소홀히 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끝내 ㆍ음을 잃어버리고 대부분 ㅏ에 섞였다. 가령 ‘ᄋᆞ(兒)’와 ‘ᄉᆞ(事)’ 등의 글자는 ㆍ를 쓰지만, 세상에서는 ‘아(阿)’나 ‘사(些)’와 같이 부른다. 또한 ㅡ에도 섞여서
【 가령 ‘ 토(土)’자를 ‘흙 토(土)’라고 읽는 것과 같다.】
그 소리가 본래 ㅏ와 ㅡ의 사이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훈민정음' 관련자료
……(중략)……
갑오경장 이래 조정에서는 비로소 언문을 조칙이나 공문서에 간간이 사용하면서 국문(國文)이라 불렀다.
7월 8일
【 음력 5월 28일이다.】
학부대신 이재곤이 국문연구소
를 설치하고 위원 약간 명을 두었다. 발음의 맑고 탁함과 글자의 높낮이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그것을 연구하도록 했는데 끝내 이룬 바가 없었다.
'국문연구소' 관련자료
『대한계년사』권8, 고종 광무 11년 정미(지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