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근대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지석영의 한글 사용을 청하는 상소

의학교장(醫學校長) 지석영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문명의 근본은 진실로 교육에 있고 교육하는 도구는 백성이 쉽게 알고 쉽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 도구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국문(國文)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문은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나라에 예전부터 문자가 없었던 것을 걱정하여 신묘한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상형(象形)하고 절음(切音)하여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원칙이 간결하면서도 쓰임이 무궁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언어와 드러내지 못하는 뜻도 모두 말로 담아 낼 수 있는데다 배우기가 매우 쉬워서 비록 아녀자나 어린아이같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며칠만 공부하면 모두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황실의 보배로운 문자이며 가르치는 도구 가운데 지남(指南)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어제정음(御製正音) 28자는 초(初), 중(中), 종(終) 3성을 병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또 고저(高低)의 정식(正式)을 갖추고 있어 조금도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교육이 해이해져 참된 이치를 잃어버리고 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소홀히 버려 두었습니다. 이에 민간에서 어린이를 가르칠 때에 글자가 이루어지고 난 뒤의 음만을 가지고 어지럽게 읽었으므로 점차 잘못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현재 사용하는 언문(諺文) 14행(行) 154자(字) 가운데 첩음(疊音)이 36개나 되고 잃은 음이 또한 36개나 됩니다. 또 고저의 정식이 전부 실전(失傳)되어 이 때문에 눈[雪]과 눈[目]은 의미를 분간하기 어렵고 동(東)과 동(動)은 음이 같아 말과 일을 기록하는 데에 구애되는 점이 많으니 신이 이를 늘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각 나라가 모두 자국(自國)의 문자를 자국에 사용하니, 자주(自主)의 의리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에 타국의 각종 문학(文學)을 모두 자국의 문자로 번역 출판하여 자국의 백성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주(五洲)의 모든 백성이 문자를 알고 시국에 통달하여 무럭무럭 날마다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통상(通商) 후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물어물하여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에만 매달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국문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함을 피하지 않고 함부로 미천한 말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교육을 담당한 신하로 하여금 우선 국문을 참고하여 정리하는 한편 편리한 방법을 사용하여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경전 가운데 성인들의 가르침 몇 편을 번역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침으로써 먼저 심지(心志)를 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최근의 실용적인 신학문(新學問)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번역하여 민간에 널리 배포한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충성하고 애국하는 일과, 경제(經濟)와 관련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알게 되어 점차 부강해지는 것을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교육이 진보하는 기초가 될 뿐 아니라 또한 황조(皇朝)를 계승하는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였다. 답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진술한 말은 참으로 백성을 교육하는 요점이다. 상소 내용을 학부(學部)로 하여금 자세히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42년 6월 6일

세종 25년(1443), 임금이 ‘모든 나라가 각각 글자를 만들어 나랏말을 적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만 글자가 없다’며 친히 낱자 28자를 만들었으니, ‘언문(諺文)’ 또는 ‘번절(反切)’이라 불렀다. ……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

초성(初聲)과 종성(終聲) 여덟 글자는 ㄱ(기역(其役)), ㄴ(니은(尼隱)), ㄷ(디귿[池末]), ㄹ(리을(梨乙)), ㅁ(미음(眉音)), ㅂ(비읍[非]), ㅅ(시옷[時]), ㆁ(이응(異凝))인데 기(其), 니(尼), 디(池), 리(梨), 미(眉), 비(非), 시(時), 이(異)의 여덟 소리는 초성에 사용되고, 역(役), 은(隱), 귿[末], 을(乙), 음(音), 읍(邑), 옷[衣], 응(凝)의 여덟 소리는 종성에 사용되었다.(말(末)과 의(衣) 두 글자는 다만 그 글자의 뜻을 취하여, 단지 우리말로 소리를 삼는다). ……

중성(中聲) 열한 글자는 ㅏ(아(阿)), ㅑ(야(也)), ㅓ(어(於)), ㅕ(여(余)), ㅗ(오(吾)), ㅛ(요(要)), ㅜ(우(牛)), ㅠ(유(由)), ㅡ(으, 응(應)에서 종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ㅣ(이(伊)), ㆍ(ᄋᆞ, ᄉᆞ(思)에서 초성을 사용하지 않는다)인데, 그 글자 모양은 옛날의 전자(篆字)와 범자(梵字)를 본떠서 사용하였다. 여러 말소리를 이 문자로 적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두루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그 뒤로 글 짓는 선비와 학자들이 ‘언문(諺文)’이라 부르며 훈민정음을 소홀히 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끝내 ㆍ음을 잃어버리고 대부분 ㅏ에 섞였다. 가령 ‘ᄋᆞ(兒)’와 ‘ᄉᆞ(事)’ 등의 글자는 ㆍ를 쓰지만, 세상에서는 ‘아(阿)’나 ‘사(些)’와 같이 부른다. 또한 ㅡ에도 섞여서(가령 ‘ᄒᆞᆰ 토(土)’자를 ‘흙 토(土)’라고 읽는 것과 같다) 그 소리가 본래 ㅏ와 ㅡ의 사이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갑오경장 이래 조정에서는 비로소 언문을 조칙이나 공문서에 간간이 사용하면서 ‘국문(國文)’이라 불렀다.

7월 8일(음력 5월 28일이다) 학부대신 이재곤이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고 위원 약간 명을 두었다. 발음의 맑고 탁함과 글자의 높낮이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그것을 연구하도록 했는데 끝내 이룬 바가 없었다.

대한계년사』권7, 고종 광무 9년 을사 8월

서언

내가 국어 문법을 30년 동안 연구하면서 원고를 모두 8차례 바꾼 끝에 이 책을 내게 되었다. 감히 완성된 것이라고 말하진 못하겠으며 사람들이 한 번 살펴보길 바랄 뿐이다. 또 이에 관해 세상에 주의를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책을 집필하는 중 제4차 원고가 누설되어 애서가(愛書家)가 이를 인쇄하고 재판(再版)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원고는 오류가 많아 독자의 의혹을 살 우려가 있기에 이를 걱정하여 한 마디를 해 둔다.

(융희 3년(1909) 맹춘(孟春) 가송관

천민거사(天民居士) 식(識)

읽을지어다. 우리 대한 문법을 읽을지어다. 우리 대한의 동포여. 우리 민족이 단군의 영명한 후예로 고유한 언어가 있으며 특유한 문자가 있어 그 사상과 의지를 목소리로 발표하고 기록으로 전하여, 언어 일치의 정신이 4000여 년을 이어져 역사의 진면목을 보호하고 문화의 정신을 증거한다.

그러나 언어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고 글자는 모양이 단순하고 용법이 쉬워서 배우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가르치며 연구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며, 어조가 변화하면서 음운에 차이가 생기고 글자가 변하여 부호의 오류가 보이는데도 이를 교정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용법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을뿐더러 문법이라는 말조차 꿈도 꿀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수백 년 동안 한문을 숭배하는 풍습이 전국을 마비시켰고, 중국에서 빌려 온 글자들이 국민의 올바른 언어를 지식인의 책상과 필자의 붓끝에서 몰아내 버렸다. 이것이 아편의 독에 취하는 것처럼 더욱 심해져서 인명(人名), 지명(地名), 국호(國號)까지도 한자로 고쳐서 쓰게 되었다. 이 말이 의심스러우면 옛 역사를 살펴보라. 을지(乙支)라는 성은 어디에서 다시 볼 수 있는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갈파지(葛坡知)와 가리개(加里介)라는 이름이나, 졸본(卒本)이나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무엇인가? 상상하건대 이는 모두 그 당시 사람들의 말소리를 그 한자로 흉내 낸 것이 아닌가?

한자는 모양을 딴 것이다. 우리의 음을 딴 글자와 그 성질이 다르기에 도저히 함께 사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글이 말을 담지 못하고 말이 글에 맞지 않아 판연히 갈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청춘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럽게 공부해도 피상적인 이해나마 얻는 자가 100명 중 1, 2명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나라 안에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배우지 못해 낫 놓고 기역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뿐더러, 문법의 학문이 아예 없기 때문에 명망 있는 학자라도 그 뜻을 생각하지 못한다.

세월이 오래 지나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나라 사람들의 이목에 점점 더 익숙해져서 말과 글자가 서로 섞이는 일이 발생했으며, 자연스럽게 서로 동화하여 우리 국어의 일부를 이뤘다. 이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사어(死語)가 영어, 프랑스어 등의 활용자(活用字)로 변화되어 온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 순한문을 쓴 문장을 얼핏 보면 우리 국문이 아니지만 그 의미의 해석은 반드시 우리 국어에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한자는 사용하지만 한문은 사용하지 않으며, 우리의 일개 보조물이자 부속품이 되기에 그치고 있다. 한자를 읽는 법은 소리를 따라 읽든지 뜻을 따라 읽든지 우리의 문법에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글자를 우리가 쓰며, 우리의 말을 우리가 쓰니 이는 곧 자연스러운 하늘의 뜻이다. ‘문법이 있어야만 그 법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 않다. 차가 바퀴 없이 가고 배가 키 없이 갈 수 있는가? 이 때문에 우리들이 수년 동안의 연구를 거쳐 이 책을 쓴 것이다. 감히 신묘한 이치와 심오한 의미를 하나 남김없이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다. 옛사람을 본받아 이렇게 책을 쓰는 것이 앉은뱅이가 한단의 걸음을 배우려고 하는 추태이지만 비틀거리며 걷더라도 결국 서울에는 갈 것이다. 연구에 오류가 많아 독자들의 조소를 면치 못하겠지만 많은 이가 협력하여 수정한다면 반드시 완성된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그 만족스럽지 못함을 스스로 위로한다.

읽을지어다. 우리 동포여. 세계 만국 중에 그 고유의 언어와 문자가 있으면서 문법이 없는 국민은 없으니, 읽을지어다. 이 문법을.

유길준, 『대한문전』, 동문관, 1909

醫學校長池錫永疏略. 我東國文, 猗, 我世宗大王, 憂國音之無文, 開發神智, 象形切音而授民者也. 其義也簡, 其用也無窮, 凡言語之難形者, 旨意之未暢者, 亦能得盡其辭, 而其學也甚易, 雖以婦孺至愚, 費了數日之工, 則皆能成就. 實皇室之寶文, 而敎具中指南也. 謹按御製正音二十八字, 以初中終三聲, 倂合而爲字, 且有高低之正式, 有不得毫髮移易者. 惜乎, 世遠敎弛, 有失眞諦, 且學文家不思硏究, 一任鹵莽, 民間訓蒙, 但以成字後音, 混淪讀去, 轉轉訛誤. 由是而現用諺文十四行一百五十四字中, 疊音居三十六, 失音亦居三十六. 且高低之定式, 全失其傳, 所以雪目混義, 東動同音, 凡紀言事, 多有窒礙, 臣常恨焉. 現今天下各國, 悉以自國之文, 行乎自國, 蓋自主之義, 未始不存乎其間, 而他國之各種文學, 莫不以自國之文, 對譯飜謄, 以敎其民. 故五洲橫目之民, 無不識字, 通達時局, 蒸蒸日進於文明之域. 獨我國, 通商幾十年, 委靡不進者. 但狃於難解之漢文, 不尙易曉之國文故也. 伏願陛下, 命敎育之臣, 爲先參互, 整釐國文, 且設方便, 使民了解, 譯經傳中幾篇聖訓, 授之愚民, 先定心志. 次譯近日務實新學中最要者, 廣布世間, 則不幾年, 人人皆知忠愛及經濟之所當爲, 而富强之漸, 可執契而竢也. 批曰, 所陳誠爲敎育齊民之要. 疏辭, 令學部商確施行.

『高宗實錄』卷46, 42年 7月 8日(양력)

世宗二十五年上以爲, 諸國各制字而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字母二十八字, 曰諺文亦曰反切 … 名曰訓民正音. 初終聲八字ㄱ其役ㄴ尼隱ㄷ池末ㄹ梨乙ㅁ眉音ㅂ非邑ㅅ時衣ㅇ伊凝, 而其尼池梨眉非時伊八音用於初聲, 役隱末音邑衣凝八音用於終聲. 末衣兩字只取本字之釋但俚語爲聲 …

中聲十一字ㅏ阿ㅑ也ㅓ於ㅕ余ㅗ吾ㅛ要ㅜ牛ㅠ由ㅡ應不用終聲ㅣ伊ㆍ思不用初聲, 其字體倣古篆梵字, 爲之諸語音文字所不能記者, 悉通無礙.

其後文士學者, 以爲諺文, 而忽之不深究之, 遂失ㆍ音多混於ㅏ, 如兒事等字從ㆍ俗呼如阿些亦或混ㅡ, 如ᄒᆞᆰ土讀爲흙土, 不知其聲本在ㅏㅡ之間

甲午更張以來, 朝廷始以諺文間用於詔勅及公文, 號曰國文, 八日舊曆五月二十八日學部大臣李載崑設國文硏究所, 置委員若干人, 而以不解音之淸濁字之平広者爲之, 竟無所成焉.

『大韓季年史』卷7, 高宗 光武 9年 乙巳 8月

緖言

本著者가國語文典의硏究로三十星霜을經ᄒᆞ야稿ᄅᆞᆯ易ᄒᆞᆷ이凡八次에此書가始成ᄒᆞ니敢히完美ᄒᆞᆫ域에入ᄒᆞ다謂ᄒᆞ지못ᄒᆞᆯ진則大方의一顧에資ᄒᆞ는ᄯᅡ람이오며此ᄅᆞᆯ因ᄒᆞ야海內의注意ᄅᆞᆯ喚ᄒᆞ는者ᄂᆞᆫ中間第四次稿本이世間에誤落ᄒᆞ야愛書家의印佈ᄒᆞᆷ이再版에至ᄒᆞ나然ᄒᆞ나該稿本ᄋᆞᆫ舛謬ᄒᆞᆫ點이多ᄒᆞ야讀者의惑ᄋᆞᆯ反滋ᄒᆞᆯ虞가有ᄒᆞᆷ이라是ᄅᆞᆯ懼ᄒᆞ야一言ᄋᆞᆯ贅ᄒᆞ노라

隆熙三年孟春嘉松館

天民居士 識

大韓文典自序

읽을지어다우리大韓文典을읽을지어다 우리大韓同胞여 우리民族이檀君의靈秀ᄒᆞᆫ後裔로 固有ᄒᆞᆫ言語가有ᄒᆞ며 特有ᄒᆞᆫ文字가有ᄒᆞ야 其思想과意志ᄅᆞᆯ聲音으로發表ᄒᆞ고 記錄으로傳示ᄒᆞ매 言文一致의精神이 四千餘의星霜을貫ᄒᆞ야 歷史의眞面을保ᄒᆞ고 習慣의實情ᄋᆞᆯ証ᄒᆞ도다.

然ᄒᆞ나 言語ᄂᆞᆫ學지아니ᄒᆞ야도能ᄒᆞ며 文字ᄂᆞᆫ形象이單純ᄒᆞ고 用法이簡易ᄒᆞ야 學ᄒᆞ기에時日ᄋᆞᆯ虛費치아니ᄒᆞᆫ즉 因仍相傳ᄒᆞ야硏究ᄒᆞᄂᆞᆫ工夫ᄅᆞᆯ加ᄒᆞ지아니ᄒᆞ며 口調의轉訛로音韻의差가生ᄒᆞ고 字形의推移로符號의謬가見호대 校正ᄒᆞ는法ᄋᆞᆯ行치아니ᄒᆞ야 今日에至ᄒᆞ야ᄂᆞᆫ 其用이正鵠ᄋᆞᆯ失ᄒᆞᆫ者가多ᄒᆞᆯᄲᅮᆫ더러 文典의名義ᄂᆞᆫ夢想에도及지못ᄒᆞ얏도다.

然ᄒᆞᆫ中 幾百年漢文崇拜ᄒᆞ는風이 全國을靡ᄒᆞ야 西隣의借來ᄒᆞᆫ客字가國民의正音ᄋᆞᆯ驅逐ᄒᆞ야 學士의案頭ᄅᆞᆯ去ᄒᆞ며 詞匠의筆端ᄋᆞᆯ離ᄒᆞᆫ즉 鴉烟의毒에中ᄒᆞᆷ갓치 迷醉愈甚ᄒᆞ야 人姓 地名과 國號ᄭᅡ지도 漢字로改書ᄒᆞ얏시니 此言ᄋᆞᆯ疑ᄒᆞ거든 古史ᄅᆞᆯ試看ᄒᆞᆯ지어다 乙支의姓ᄋᆞᆫ何處에復見ᄒᆞᆯ고 葛坡知와加里介의名이今世에尙存ᄒᆞ거니와 卒本이니徐羅伐이라ᄒᆞ든號ᄂᆞᆫ其意가何據ᄒᆞᆫ가 想像컨대 此皆其時人語의音ᄋᆞᆯ 彼漢字로翻寫ᄒᆞᆷ이오녀.

盖彼字ᄂᆞᆫ象符라 我의音符字와其性質이異ᄒᆞᆫ즉 到底 同體의用ᄋᆞᆯ成ᄒᆞ기能치못ᄒᆞᆫ故로 文이言ᄋᆞᆯ載치못ᄒᆞ고 言이文에配치못ᄒᆞ야 判然二致의結果ᄅᆞᆯ生ᄒᆞ매 靑春으로브터 白首에至토록 螢雪의苦ᄅᆞᆯ積ᄒᆞ야도 其皮相의識解ᄅᆞᆯ得ᄒᆞ는者가 百中一二에過치아니ᄒᆞ니是ᄅᆞᆯ由ᄒᆞ야 國中의普通文學되지못ᄒᆞᆷ으로 目中一丁字ᄅᆞᆯ不知ᄒᆞ는人이 在在皆是ᄲᅮᆫ더러 文典의學ᄋᆞᆫ 彼에在ᄒᆞ야도本無ᄒᆞᆫ緣由로 雖鴻儒의名이有ᄒᆞᆫ者라도 其意義에想到치못ᄒᆞᆷ인저.

歲月ᄋᆞᆯ經ᄒᆞᆷ이久ᄒᆞ매 其行用이愈慣ᄒᆞᆷ으로 國人의耳目에稍熟ᄒᆞ야言語間援入ᄒᆞ는例가生ᄒᆞᆫ즉 自然同化ᄒᆞ는法이我國語의一部ᄅᆞᆯ成ᄒᆞ니 是其古代希臘及羅馬의死語가 現時英吉利 佛蘭西諸國의의活用字로 轉化ᄒᆞᆫ理와一轍이로다.

今夫純然ᄒᆞᆫ漢字로編綴ᄒᆞᆫ文章ᄋᆞᆯ 表面으로觀ᄒᆞ는時ᄂᆞᆫ 我의國文아니라도 其意味의解釋ᄋᆞᆫ我의國語ᄅᆞᆯ必資ᄒᆞ는지라 故로 我國에ᄂᆞᆫ 漢字의用ᄋᆞᆫ有호대 漢文ᄋᆞᆫ其用이無ᄒᆞ야 我의一補助物이며附屬品되기에止ᄒᆞ는者인즉 其讀法ᄋᆞᆫ 音讀ᄋᆞᆯ由ᄒᆞ든지 訓讀ᄋᆞᆯ主ᄒᆞ든지 我의文典에依ᄒᆞ야 成立ᄒᆞ는外에ᄂᆞᆫ 他道가無ᄒᆞ고녀.

然則我의文ᄋᆞᆯ我가用ᄒᆞ며 我의語ᄅᆞᆯ我가用ᄒᆞ니 此乃自然ᄒᆞᆫ天機의發ᄒᆞ는者이니라 何必文典의有ᄅᆞᆯ待ᄒᆞ야 其法ᄋᆞᆯ始解ᄒᆞ리오ᄒᆞ나 此ᄂᆞᆫ決코然치아니ᄒᆞ니 車가輪업시能히轉ᄒᆞ며 舟가柁아니고能히行ᄒᆞ는가 是故로 吾人이屢年의硏究ᄅᆞᆯ經ᄒᆞ야 是書의作이有ᄒᆞᆷ이로니 敢히갈오대 妙理ᄅᆞᆯ透悟ᄒᆞ며 奧旨ᄅᆞᆯ闡發ᄒᆞ야 餘蘊이無ᄒᆞ다ᄒᆞᆷ이아니오 樣ᄋᆞᆯ依ᄒᆞ야葫蘆ᄅᆞᆯ畫ᄒᆞᆷ이 躄者의邯鄲步ᄅᆞᆯ學ᄒᆞ는醜態로대 傍走ᄒᆞ야도 京府에亦達ᄒᆞᆷ은庶幾ᄒᆞᆯ듯 其意義의穿鑿과 式套의舛誤가 具眼者의譏笑ᄅᆞᆯ免치못ᄒᆞᆯ지나 大方君子의修正ᄒᆞ는功ᄋᆞᆯ資ᄒᆞ야善美ᄒᆞᆫ域에入ᄒᆞᆷᄋᆞᆫ 其日의必至ᄒᆞᆷᄋᆞᆯ可期ᄒᆞᆯ지니 是로써 自足ᄒᆞ야 其洽滿치못ᄒᆞᆷᄋᆞᆯ自慰ᄒᆞ노라.

읽을지어다 우리同胞여 天下萬國에 其特有ᄒᆞᆫ言語文字가有ᄒᆞ고 文典업는國民ᄋᆞᆫ업시니 읽을지어다 이文典ᄋᆞᆯ.

兪吉濬, 『大韓文典』, 同文館, 1909

한글은 1443년(세종 25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세종이 주도하여 창제하였다. 만들어진 당시부터 사대주의적인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던 한글은, 이후 한국 정부의 보급 의지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중심의 학문-관료 사회에서는 정착하지 못하였다. 대신 조선조 전체에 걸쳐 여성이나 중인, 평민을 중심으로 보조 문자로서 사용되면서 ‘언문(諺文 )’, ‘암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천대를 받아 왔다.

그러던 중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한글을 ‘국문(國文)’이라 부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자로 처음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해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및 1895년(고종 32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에서, 법령은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규정하였다. 이후 모든 공문서는 국한문 혼용을 원칙으로 작성하였다. 그러나 한글은 수백 년 넘게 언어학적인 조정이 가해지지 않아서 실제로 운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또한 유학자-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주류 집단은 여전히 한글 이용을 거부했으며, 일선 교육 현장에서도 한글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본 사료 중 첫 번째는 개화 지식인이자 관료인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이 한글의 문법적 정리와 적극적인 보급을 건의한 상소이다.

지석영은 1855년(철종 6년) 5월 15일 서울 원동에서 지익룡(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매우 가난한 집안이었으며,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한학과 의학을 함께 배우는 등 실용적인 학풍을 경험하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 관료로서 실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화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한국 정부에서 완전히 소외된 상태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친일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한국 정부에 복귀하여 다양한 개화 정책을 추진해 갔다.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 의학교 설립을 건의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의학 방면에서도 계속 활동하는 한편,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고 보고 1905년(광무 9년)부터 한글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본 사료에서 소개된 지석영의 상소에 기초해서 7월 19일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새로 수정한 6개 항목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05년 「신정국문」의 내용 중에 결점이 있음이 지적되면서 1906년(광무 10년) 5월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건의로 1907년(융희 1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정교(鄭喬, 1856~1925)가 『대한계년사』에 기술한 두 번째 사료다.

국문 연구소훈민정음 창제 당시 정음청(正音廳)이 설치된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 말엽부터 한글의 문자 및 문법을 정리하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개인적인 연구는 진전되었으나 이를 통합해 안정적인 문자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데 국가적인 동의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본 사료는 소략한 내용이지만 한글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 1906년 이후 학부에서 근무했던 정교가 당시 공식적인 한국 정부 자료들을 직접 열람하고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문 연구소 규칙」 제1조에 “본소에서는 국문의 원리 및 연혁과 현재의 행용(行用) 및 장래 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국문 연구소 조직은 개설 당시 위원장에는 학부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 위원으로 학부 편집국장 장헌식(張憲植, 1869~?), 한성 법어 학교(漢城法語學校) 교장 이능화, 내부 서기관 권보상(權輔相), 주시경(周時經, 1876~1914) 및 학부 사무관이던 일본인 우에무라 마사키(上村正己)가 임명되었다. 한 달 뒤인 8월 19일 학부 편집국장 장헌식이 해임되고, 어윤적(魚允迪, 1868~1935)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9월 16일 첫 회의를 열어 「국문 연구소 규칙」의 작성과 위원의 보선을 논의하여 9월 23일자로 이종일(李鍾一, 1858~1925), 이억(李億, 1863~1936), 윤돈구(尹敦求), 송기용(宋綺用), 유필근(柳苾根) 등 5명이 새로 임명되었고, 1908년(융희 2년) 1월에는 지석영이, 6월에는 이민응(李敏應)이 위원으로 추가 선임되었으며, 8월과 10월에는 이억, 현은, 이종일, 유필근이 해임되었다.

활동은 1907년 9월 16일 제1회 회의를 개최한 이래 회의를 23회 열었는데, 그 최종 회의는 1909년 12월 27일에 있었다. 그동안 위원장은 10회에 걸쳐 모두 14개 항의 문제를 제출하였고, 이에 대한 토론과 의결을 거쳐 1909년(융희 3년) 12월 28일자로 최종적인 보고서를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보고서는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8명 위원의 연구안으로 꾸며졌는데,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결국 「국문연구의정안」은 세상에 공포되지 못하였다.

한편, 「국문연구의정안」은 앞서 토의에 붙였던 14개 항의 문제를 10개 항으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① 국문의 연원과 자체(字體) 및 발음의 연혁, ② 초성 중 ,ㆆ, △, ◇, ㅱ, ㅸ, ㆄ, ㅹ 여덟 자를 다시 사용할지 여부. ③ 초성의 ㄲ, ㄸ, ㅃ, ㅆ, ㅉ, ㆅ 여섯 자를 쓰는 서법(書法), ④ 중성 중 ‘ㆍ’자 폐지와 ‘=’자를 새로 만들 것인지 여부, ⑤ 종성의 ㄷ, ㅅ 두 자의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여섯 자도 종성에 사용할 것인지 여부. ⑥ 자모(字母)의 7음과 청탁(淸濁)의 구별 여하, ⑦ 사성표(四聲票)의 용부(用否) 및 국어음의 고저법 개정, ⑧ 자모의 음독(音讀) 일정을 일정하게 할 것, ⑨ 자순(字順)과 행순(行順)을 일정하게 할 것, ⑩ 철자법 등이었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문자 체계와 표기법의 통일안이라고 할 수 있다. ‘ㆍ’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이 의정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 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사료는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909년 간행한 국어 문법책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의 서언(緖言) 및 자서(自序)다. 유길준은 서언에서 자신이 30여 년간 국어 문법을 연구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조선이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외교 관계를 맺었던 1870년대부터 연구를 수행해 왔다는 것이나, 실제로는 1896년(고종 33년)부터 1907년(광무 11년)까지의 일본 망명 생활 도중에 주로 집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언에서 유길준은 이 책의 원고를 여덟 번에 걸쳐서 교정해 왔으며, 이 중 네 번째 원고가 유출되어 다른 애서가(愛書家)에 의해 출판되었을 뿐 아니라 재판(再版)까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1908년 최광옥(崔光玉)이 안악군학회(安岳郡學會)를 통해 간행한 『대한문전』을 말하는 것이다. 1909년 유길준의 이름으로 간행한 『대한문전』은 1908년 최광옥 판에서 품사 중 ‘후사(조사)’를 접속사에 포함시켰고 어미에 해당하는 조동사를 독립시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그 외에는 거의 모든 내용이 동일하다. 또한 최광옥의 『대한문전』에는 이상재(李商在, 1850~1927)가 추천한 서문만 포함되어 있을 뿐 집필 과정 및 의의를 직접 밝힌 저자의 서문이 없다는 점에서 유길준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후 이어지는 자서(自序)에서, 유길준은 우리나라는 고유의 말과 글을 다 갖는 등 문화적 특징이 있으나, 글을 배우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가 오히려 부족해서 정확한 글자의 보존 및 전승이 불가능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한자를 통해 우리의 언어를 표현한 것이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자를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반드시 우리의 문법에 따라야만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한문전』 체제는 크게 총론, 언어론, 문장론으로 나뉜다. 총론에서는 문법의 의미, 음운(音韻), 문자 등 어문학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설명하였다. 언어론에서는 명사, 대명사, 동사, 조동사, 형용사, 접속사, 첨부사, 감동사 등 8개의 품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문장론에서는 주어, 설명어, 객어, 보족어, 수식어 등 문장의 본원(本原)과, 구(句)⋅절(節) 등 문장의 부분, 단문⋅복문⋅중문 등 문장의 종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는 당시 일본에 전해진 서구 언어학의 문법 체계와 동일한 형식으로, 유길준은 이를 참고하여 『대한문전』을 서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문전』은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저술한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과 함께 초기 국어 문법 연구의 성과를 보여 주는 자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지석영의 국문연구와 보급」,『어문논총』14,김영진,동서어문학회,1999.
「지석영의 국어학 연구」,,박호현,대구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2.
「지석영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한국학보』30,신용하,일지사,2004.
저서
『개화기의 한글운동사』, 이용호, 성청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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