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우리 동방에 단군이 처음 강림하셨을 때 아직 글자가 없어 증거할 만한 문헌이 전해지지 않았다. 기자께서 8조를 만들어 인민을 교육하셨으니, 우리나라에 처음 나타난 첫 번째 성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 후에 인민이 개명하고 서적이 점차 모여서 신라와 고려 대에는 저명한 선비들이 적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식견이 부족하여 이를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태조 대왕
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문(文)을 높이는 정치를 통해 백성들을 문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니, 100여 년간 천하 성현
들의 학문과 옛 서적이 모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때 어진 사람들이 무리지어 나오고 문장(文章)이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기상이 천하에 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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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와와 쇠가 서로 질이 다르고 이와 뿔을 함께 쓰기 어려운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학문을 직업으로 삼기는 어렵기 때문에 세종대왕
께서 따로 한 가지 문자를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도 모두 개명케 하셨으니 이것이 국문(國文)이다. 그 글자가 극히 쉬워서 어린아이나 여자라도 몇 달만 배우면 평생 동안 사용할 수 있다. 매 세대마다 이를 배우는 자가 10에 5, 6이 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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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황제 폐하께서 갑오년(1894) 중흥(中興)의 기회를 맞아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정하시고 새로이 경장(更張)하는 정령(政令)을 반포하실 때에 특히 한문과 한글을 같이 사용하여 공사 문서(公私文書)를 국한문으로 섞어 쓰라는 칙교(勅敎)를 내리셨다. 모든 관리가 이를 받들어 근래에 관보와 각 부군(府郡)의 훈령, 지령과 각군(各郡)의 청원서, 보고서가 국한문으로 쓰였다. 이제 본사에서도 신문을 확장하려는 때를 맞아 국한문을 함께 쓰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황제 폐하의 성칙(聖勅)을 따르기 위해서이며, 또한 옛글과 현재의 글을 함께 전하고 많은 사람들에 읽히기 위함이다.
『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 「사설 : 석아동방에 단군이 초강하매 인문이 미창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