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과 사회와 나
나운규
「아리랑」
제가 여러 해를 일본이나 기타 해외로 돌아다니다가 귀국해서 처음 내놓은 작품이 「아리랑」이었습니다. 「아리랑」에 대해서는 벌써 신문이나 잡지에 여러 번 비평이 실렸기 때문에 제가 지금 새삼스럽게 그에 대한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4년 전에 처음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뒤 오늘까지 평양, 대구, 부산 등 주요 각 도시에서 16회나 상영되었다니, 나로서는 여러분의 지지가 이렇게 두터운 것에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을 뿐입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 「아리랑」을 촬영할 때에 내 자신은 전신이 열에 끓어오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아가 돈이 되거나 말거나 세상 사람이 좋다고 하건 말건 그런 불순한 생각을 터럭 끝만큼이라도 없이 오직 내 정신과 역량을 다해 내 자신이 자랑거리가 될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 순정이 가득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한 편에는 자랑할 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 놓은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 수 있는 그 집단의 정신은 의로웠고 용맹했던 것이나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리랑고개’, 이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하는 일관한 정신을 거기 담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잘 잇거라」
자신이라면 어폐가 있습니다만 좌우간 몇 편의 내 영화 중 다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전에 설명한 「아리랑」과 또 「잘 있거라」, 「저 강을 건너서」 등입니다. 「잘 있거라」는 시나리오를 전부 개작한 것이 두 번이고, 검열로 삭제된 부분도 여러 곳입니다. 또 「저 강을 건너서」 역시 여러 차례의 개작에도 불구하고 여러 부분이 삭제되어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많이 못하고 만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다른 말이나 이 기회에 하고 싶었던 말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제 작품이 제 마음대로 되지 못할 때,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용기는 다 어디 갔는지 오직 제작이 끝난 뒤는 그 시사조차 보고 싶은 용기가 없어지더군요.
제가 영화계에 나올 때 생각한 바는 종래 우리 영화의 느린 템포를 빨리 할 것과 배우들의 동작을 스피디하게 하여 예전에 15권 만들던 것을 7, 8권으로 줄이려고 했던 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서양 배우로는 「우처(愚妻)」에 나왔던 ‘스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1885~1957)’이란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밖에 ‘에밀 야닝쓰(Emil Jannings, 1884~1950)’ 같은 사람도 좋아합니다.
어쨌든 저는 경우가 경우였기에 공부를 넉넉히 못했던 것이 유감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공부하고 싶은 생각에 늘 가슴이 타오릅니다. 그러기에 이번 가을에 혼신의 힘을 다해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해 놓고 몇 해 작정하고 해외에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배우로 나서지는 않고 영화의 제작 방면에 전력을 다하려 합니다.
『삼천리』 제7호, 1930년 7월 1일, 나운규, 「「아리랑」과 社會와 나」, 5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