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근대일제 하의 대중문화

대중과 함께 울고 웃은 신파극-「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동양 극장에서는 이미 영화 제작을 진행 중에 있었다. 작년 12월부터 제1회 작품으로 임선규 씨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고려 영화사의 이창용 씨와 협동하여 촬영 중이었는데, 방금 촬영을 마치고 동양 극장 측 최상덕 씨와 고려의 이창용 씨와의 공동 경영작인 경성 촬영소에서 세트와 녹음까지 완료하였다고 하는데 개봉은 늦어도 오는 3월 상순이라고 한다.

원작 임선규, 각색 도무, 촬영 최순흥, 연출 이명우

출연 황철, 변기종, 김숙영, 차홍녀, 김동규, 김선초, 이동호, 김선영, 복원규

〈동아일보〉 1939년 2월 8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동양⋅고려 협동 작품

사랑에 속고 돈에 운 차홍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경성 공연만 해도 수십 차례 될 것이다. 번번히 차홍녀는 무대에서 정말 자기의 현실인 듯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 극장 영화 제작부에서 이번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화함에 따라 홍녀 양은 스크린에서 또 한 번 더 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늦어도 이 영화가 3월엔 개봉될 것이라고 하니 홍녀 양의 팬은 더 한 번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눈물을 볼 것이 아닌가.

삼천리』제11권 제4호, 1939년 4월, 기밀실, 우리 사회의 여러 내막

먼저 우리 극단의 소사(小史)를 쓰기 전에 조선 연극의 유래를 몇 마디 쓰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대정(大正) 원년(1912)에 비로소 내지(內地)로부터 신파극을 모방해서 조선 신파 연극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상연을 하게 된 것이 조선에서 첫 연극 운동의 시작이었다.

우선 첫출발로 경성에 있는 원각사, 연흥사와 개성에 있는 개성좌에서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하는 쟁쟁한 징 소리에 맞추어 막이 열렸다. 그때 원각사에는 윤백남 선생이 지도하는 극단 문수성이 있었고, 연흥사에는 고 임성구 씨가 지도하는 극단 혁신단이 있었으며, 개성좌에는 이기세씨가 지도하는 극단 유일단이 있었다. 이 3개 단체의 공연을 비롯하여 연극 단체는 계속적으로 조직되어 경성 시내 각 극장 중 장안사에는 극단 이화단, 광무대에는 극단 계림 미단, 단성사에는 극단 혁신 조선 미단이 각각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이 각 극장에서는 연극 단체가 경쟁적으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파 연극 구경 가자 하고 밀려드는 관중이 각 극장에 입추의 여지가 없더니 웬일인지 한 번씩 와 보고는 아무런 소감 또는 오락적 흥미라도 맛보지 못한 까닭인지 불과 몇 달 가지 못해서 관객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정황을 회고해 보면 물론 연극의 가치라든가 관중을 끌 만한 매력이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나 본래 연극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대중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일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이리하여 각 극단은 조직 당초부터 경영난에 빠지게 되니 부득이 지방 공연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각 극장 3단체가 지방 공연을 떠나는 순서에 따라 문을 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내지인(=일본인) 흥행업자들은 각 극장을 매수해서 활동사진 상설관을 만들고 말았다. 그때 원각사는 지금 서대문정(町) 구세군 본영 부근 주택지로 변하고, 연흥사는 지금 인사정 조선 극장 터이고, 장안사는 지금 돈의정 열빈 요리점으로 바뀌고, 단성사는 지금 원은정 대륙 극장이고, 광무대는 지금 황금정 빈총 극장이다.

그때 지방 공연을 떠나간 각 단체는 물론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해산을 하고 단체 명칭을 바꿔 가지고 다시 모이고 하면서 말 못 할 고역을 넘고 또 넘어오며 몇몇 동지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 기세로 연극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렇게 20년이 지나니 문화의 발전에 따라 관중도 연극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연극인 자신도 각자의 기능을 발휘할 과정에 이르렀으나, 연극을 할 극장이 없어서 연극인들 가슴속에는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이리하자 소화 11년(1936)에 이르러 우리의 은인 고 홍순언 씨가 우리 연극인들이 극장이 없는 것에 한이 맺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그의 피와 땀으로 쌓고 장식해 놓은 것이 흡족하진 못하지만 바로 현재 동양 극장이다.

그는 어렵고 없는 가운데서 연극의 전당 동양 극장을 건설해 놓고 연극인을 소집하게 되었다. 먼저 박제행, 황철, 서월영, 심영, 김동규, 복원규, 고 차홍녀, 김선초, 김선영, 그 외 몇몇 사람으로 청춘좌를 조직하였다.

소화 11년 12월 14일 오후 7시에 웅장한 징 소리가 나자 우리 청춘좌의 첫 공연의 막은 올라갔다. 기대하였던 관중들에게서 “야!” 하는 소리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소리쳐 나왔다. 그는 정열을 다해서 설비한 무대 장치를 보고 당시 경영주 고 홍순언 씨에게 감탄하는 첫 인사인 “야!” 소리였다.

그때 출연하는 우리들도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되는 ‘창공 장치! 이상적인 건물 장치! 적합한 의상!’ 등 여러 가지가 종합되어 전일에 자신들이 구해 내지 못한 표정 동작이며 모든 분위기가 한층 새로워진 것 같아서 그만 기분에 도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때 기쁨을 회상하고 고 홍순언 씨를 추억하니 필자의 붓대는 모르는 사이에 잠깐 동안 멈추어지고 만다.

세상은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경영주 홍 씨는 개관한 지 1년 후에 너무나 사업에 정열을 바친 탓인지 우연히 병이 나서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결국 자기 손으로 곡괭이를 들고 삽을 잡아 가며 세워 놓은 동양 극장을 남겨 놓고 영원히 연극 사업을 같이 하자던 동지들의 손길을 떨치고! 그만 감기 싫은 눈을 감으며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주인을 잃은 우리 청춘좌원은 막연하였다. 사업상으로 이해 있는 주인을 잃은 것이 안타까웠고 인간적으로 그의 일생이 너무도 짧았던 것이 몹시 애석했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한 태도로 세상을 떠난 그를 잊어버리는 도리밖에 아무런 수가 없었다. 그 후 청춘좌는 홍씨 생존 시에 지배인 역으로 관할하던 최상덕 선생이 동양 극장을 인수해서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해서 우리 청춘좌는 최 선생을 새 주인으로 맞이하여 선생의 이해 넓으신 옹호와 온후하신 위로 속에 우리의 성의는 재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최 선생이 경영하는 동안 그때는 누구나 불경기를 외치던 때라 물론 수입상으로 보아 수지가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본래 빈곤에 빠져 있는 우리 연극인들이라 끊임없이 드나드는 것이 최 선생의 방이니 모두가 곤란한 사정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인정 있는 최 선생께서는 경영주라는 위신으로나 또는 각자의 사정에 끌려 십중팔구는 각자 요구에 응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지 계산에 눈이 어두운 우리는 그렇게 경영난에 빠져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최 선생이 경영하신 지 3년 되는 소화 14년 8월에 비로소 최 선생이 경영을 중지한다는 선언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 가슴을 움켜잡고 어찌해서 진작 우리에게 경영난에 관한 타협이 없었던가 하고 최 선생을 원망도 해 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심하신 데는 우리 역시 그만 동정이 끌리고 말았다.

또 주인을 잃어버린 우리 청춘좌는 어떻게 할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토의한 결과 청춘좌가 경영주를 떠나 독자 경영을 하자는 문제에 이르렀으나, 그 역시 일치되지 못한 관계상 각자가 개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 하던 동지 간에 눈물겨운 작별을 하고 한일송 외 몇몇 동지는 정 깊은 동양 극장에 남아서 우리 청춘좌는 세 번째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는 현 동양 극장 경영주 젊은 실업가 김태윤 씨다.

새 주인을 맞이한 우리는 인정 문제를 떠나서 연극 활동에 충실하자는 목표 밑에서 좌원을 보충하여 소화 14년 9월 16일에 동양 극장 혁신 공연이라는 간판 아래서 우리 청춘좌는 다시 공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금번 맞이한 새 주인이 연극계에는 전혀 생소한 분이므로 연극 활동에 있어서나 사업상에 많은 지장이나 있지 않을까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염려를 하였다. 하지만 벌써 1주년이 지나가고 2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지장이 없이 순조롭게 업무를 진행시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새 주인 김씨의 수완과 덕망에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지도하심에 순응할 것을 각오한다.

현재 청춘좌원

한일송, 김승호, 강노석, 김철, 복원규, 김윤호, 남상억, 최대규, 허영, 진랑, 박옥초, 강보금, 이광숙, 이세연, 이길재, 권서추, 김옥자, 조미령, 변기종 이상

끝으로 독자 제현과 청춘좌의 연극을 사랑하는 제현께 드릴 말씀은 우리 청춘좌의 진용을 강화시키고 신체제 하의 국민된 의무로서 충실한 연극 활동을 하고자 하는 우리 청춘좌의 기획을 기대하시라.

삼천리』제13권 제3호, 1941년 3월, 청춘좌, 조선 대표 극단 종합판

東洋劇場에서는 이미부터 映畵製作을 懸案中이던바 작년 十二月부터 第一回作品으로 林仙圭氏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高麗映畵社의 李創用氏와 協同하여 撮影中이엇는데 方今 撮影을 마치고 東劇側 崔象德氏와 高麗의 李創用氏와의 共同經營作인 京城撮影所에서 세트와 錄音까지 完了하엿다는데 封切은 늦어도 오는 三月上旬에는 보리라고 한다.

原作 林仙圭, 脚色 都武, 撮影 崔順興, 演出 李銘牛,

出演 黃澈, 卞基鍾, 金淑英, 車洪女, 金東圭, 金仙草, 李東胡, 金鮮英, 卜元圭

〈東亞日報〉 1939年 2月 8日 「사랑에속고 돈에울고」 東洋⋅高麗協同作品

사랑에 속고 돈에 울은 車紅女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京城공연만 해도 수십차 될 것이다. 번번히 車紅女는 무대에서 정말 자기의 현실인 듯이 울었다 한다. 그런데 東洋劇場 영화제작부에서 이번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함에 따라 紅女양은 스크린에서 또 한번 더 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느저도 이 영화가 3월엔 封切되리라니 紅女양의 펜은 더 한번 孃의 아릿다운 자태와 눈물을 볼 것이 아닌가.

『三千里』第11卷 第4號, 1939年 4月, 機密室, 우리 社會의 諸內幕

靑春座小史

먼저 우리 극단의 小史를 쓰기 전에 朝鮮 연극의 유래를 몇 마디 쓰고저 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大正원년(1912년)에 비로소 內地로보터 신파극을 모방해다가 朝鮮 신파연극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상연을 하게 된 것이 朝鮮의 처음으로 연극운동의 시작이였다.

우선 첫출발로 京城에 圓覺社, 演興社, 開城에 開城座에는 朝鮮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하는 淨淨한 木頭(キガシラ)(木頭는 현재 각 극단에서 사용하는 銅鑼와 같은 것) 소래에 맛추어 막은 열렸다.

그때 圓覺社에는 尹白南선생이 지도하시는 劇團 文秀星이 있었고 演興社에는 故 林聖九씨의 지도하는 극단 革新團이 있었고 開城座에는 李基世씨가 지도하시는 극단 唯一團이 있었다.

이 3개 단체의 공연을 비롯하여 연극단체는 계속적으로 조직되여 京城시내 각 극장 중 長安社에는 극단 以和團, 光武臺에는 극단 鷄林美團. 團成社에는 극단 革新鮮美團이 각각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같이 각 극장에는 연극단체가 경쟁적으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파연극 구경가자 하고 밀려드는 관중이 각 극장에 입추의 여지가 없더니 그 웬일인지 한번씩 와 보고는 아모런 소감 또는 오락적 흥미라도 맛보지 못한 까닭인지 불과 몇 달 가지 못해서 관객은 발길이 끈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정황을 회고해 보면 물론 연극의 가치라든가 관중을 껄만한 매력이 없었든 것마는 사실이나 본래 연극이라 무엇인지를 모르는 대중을 극장 안으로 껄어드릴 아무런 책동이 없었다.

이리하여 각 극단은 조직당초부터 경영난에 빠지게 되니 不得己 지방공연을 떠나가게 되었다. 이러고 보니 각 극장 3단체가 지방공연을 떠나가는 순서에 따라 문을 닷게 되었다.

그리자 內地人 흥행업자들은 각 극장을 매수해서 활동사진 상설관을 만들고 말었다.

그때에 圓覺社는 지금 西大門町 救世軍本營附近 住宅地로 변하고 演興社는 지금 仁寺町 朝鮮劇場跡이고 長安社는 지금 敦義町 悅賓요리점으로 化하고 團成社는 지금 援恩町 大陸극장이고 光武臺는 지금 黃金町 賓塚극장이다.

그때 지방공연을 떠나간 각 단체는 물론 수지가 맛지 아니했다. 그래서 해산을 하고 단체명칭을 바꾸워 가지고 다시 모이고 하면서 말못할 고역을 넘고 또 넘어오며 몇몇 동지는 百折不屈하는 기세로 연극행동을 계속해 왔다.

이러기를 20星霜을 지나오니 문화의 발전됨을 따라 관중도 연극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연극인자신도 각자의 기능을 발휘할 과정에 일으렀으나 연극을 할 극장이 없어서 연극인들 가슴 속에는 원한이 사못처 있었다.

이리하자 昭和 11年에 일으러 우리의 은인 故 洪淳彦씨가 우리 연극인들이 극장이 없어 한이 되는 것을 알었다는 듯이 그의 피와 땀으로 쌓고 장식해 논 것이 불만하나마 바로 현재 동양극장이다.

그는 어렵고 없는 가운데서 연극의 전당 동양극장을 건설해 놓고 연극인을 召集하게 되었다. 먼저 朴齊行, 黃澈, 徐月影, 沈影, 金東圭, 卜元圭, 故 車紅女, 金仙草, 金鮮英, 그 외 몇몇 사람으로 靑春座를 조직하였다.

昭和 11年 12월 14일 오후 7시에 웅장한 銅鑼소리가 나자 우리 靑春座의 첫공연의 막은 올라갔다. 기대하였든 관중들은 야! 하는 소리가 피차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소리처 나왔다. 그는 정열을 다해서 設備해 논 무대장치를 보고 其時 경영주 故 洪淳彦씨에게 대하야 감탄하는 첫인사의 야! 소리였다.

그때 출연하는 우리들도 朝鮮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되는 蒼空裝置! 이상적인 건물장치! 적합한 의상! 이 여러 가지에 종합되여 전일에 자신들이 구해 내지 못한 표정동작이며 모든 분위기가 한증 새로워진 것 같해서 그만 기분에 陶醉해 버리고 말었다.

그때 기쁨을 회상하고 故 洪淳彦씨를 추억하게 되니 필자의 붓대는 不知中 잠간동안 멈처지고 만다.

세상은 好事多魔라드니 경영주 洪씨는 개관한지 1년 후에 넘우도 사업에 정열을 받친 탓이든지 우연이 병이 나자 藥石의 効가 없이 자기 손으로 곡괭이를 들고 삽을 잡어가며 세워 논 東劇을 남겨놓고! 영원이 연극사업을 같이 하자든 동지들의 손길을 떨치고! 그만 감기 실흔 눈을 감으며 不歸의 객이 되고 말었다. 그리고 보니 주인을 잃은 우리 靑春座員은 寞然하였다. 사업상으로 이해 있는 주인을 잃은 것이 안타까웠고 인간적으로 그의 일생이 넘우도 짤벗든 것이 몹시 애석했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한 태도로 세상을 떠난 그를 잊어버리는 도리밖에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其後 靑春座는 洪씨 생존시에 지배인 역으로 統轄하시든 崔象德선생이 東劇을 인계해서 경영하시게 되었다.

그리해서 우리 靑春座는 崔선생을 새 주인으로 맞이하게 되매 선생의 이해 넓으신 擁護와 온후하신 위로에 우리의 성의는 재출발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崔선생이 경영하는 동안 그때는 누구나 불경기를 외치든 때라 물론 수입상으로 보아 수지가 평등하리라고는 생각을 아니했으나 本是가 빈곤에 빠저 있는 우리 연극인들이라 끈임없이 드나드는 것이 崔선생의 방이니 모두가 곤란한 사정뿐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인정있는 崔선생께서는 경영주라는 위신으로나 또는 각자의 사정에 끌려 십중팔구는 각자 요구에 응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지계산에 盲目인 우리는 그다지 경영난에 빠저 있는 것은 모르고 있다가 崔선생이 경영하신지 3년되는 昭和 14年 8월에 비로소 崔선생이 경영중지한다는 선언을 듣고서야 알었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 가슴을 움켜잡고 어찌해서 진작 우리에게 경영난에 관한 妥協이 없었든가 하고 崔선생을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에게 약점을 아니 보히려고 고심하신 데는 우리 역시 그만 동정이 끌리고 말었다.

또 주인을 잃어버린 우리 靑春座는 어찌할고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토의한 결과 靑春座가 경영주를 떠나 獨營을 하자는 문제에 일으렀었으나 그 역시 일치가 되지 못한 관계상 각자가 개인행동을 취하기로 결의가 되었다.

그리하야 오랫동안 苦樂을 같이 하든 동지간에 눈물겨운 작별을 고하고 韓一松외 몇몇 동지는 정깊은 東劇에 남어 있어 가지고 우리 靑春座는 세 번째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는 현 東劇 경영주 젊은 실업가 金泰潤씨다.

새 주인을 맞이한 우리는 人情문제를 떠나서 연극행동에 충실하자는 목표 밑에서 座員을 補充해 가지고 昭和 14年 9월 16일에 東洋극장 혁신공연이라 간판아래서 우리 靑春座는 다시 공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금번 맞이한 새 주인이 연극계에는 전혀 생소하신 분임으로 우리 연극행동에 있어서나 사업상에 많은 지장이나 있지 아니할가 하고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염려를 하였으나 벌써 1주년이 지나가고 2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오늘에 일으기까지 아모런 지장이 없이 순조로 업무를 진행시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새 주인 金씨의 수완과 덕망에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지도하심에 순응할 것을 각오한다.

現在 靑春座員

韓一松 金勝鎬 姜魯石 金鐵 卜元圭 金允浩 南相億 崔大奎 許影 陳娘 朴玉草 姜寶金 李珖淑 李世燕 李吉宰 權瑞秋 金玉子 趙美鈴 卞基鍾 以上

끝으로 讀者諸賢과 靑春座 愛劇家 諸賢께 드릴 말슴은 우리 靑春座의 陣容을 강화시키고 신체제하의 국민된 의무로서 충실한 연극행동을 하고저 하는 우리 靑春座의 기획을 기대하시라.

『三千里』第13卷 第3號, 1941年 3月, 靑春座, 朝鮮代表劇團 綜合版

1920년대 이래 대중극(신파극)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인기를 얻었고, 1930년대에는 대중 스타가 배출될 정도로 광범위한 무대와 관객을 장악했다. 이 자료는 1935년 11월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인 동양 극장의 최고 인기물이었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영화화되는 과정과 동양 극장의 설립과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동양 극장은 당대 최고 수준의 극작가와 연출가, 그리고 최정상급의 배우들을 영입하여 성황리에 연중 무휴로 공연하였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1936년 7월 극단 청춘좌에 의해 동양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임선규가 쓴 4막 5장의 이 작품은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오빠의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시집의 무시와 괄시를 받고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 받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편의 새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의 손에 잡혀 가게 된다는 줄거리다. 여주인공 홍도 역에는 차홍녀, 홍도의 오빠 철수 역에 황철, 홍도를 배신하는 남편 광호 역에 심영, 홍도를 끝까지 괴롭히는 시누이 역에 한은진 등 당대 최고 인기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이 신파극은 당시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단한 흥행을 불러일으켰다.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공연을 보러 동양 극장 앞으로 몰려와, 서대문 경찰서에서 동원된 경관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특히 공연 기간 내내 서울 시내 기생들이 떼로 몰려왔는데, 홍도와 자신을 동일시한 기생들의 눈물로 극장은 연일 울음바다가 됐다. 장안의 기생들을 구경하려고 극장을 찾은 한량도 많았다. 서울에서만 수십 번의 재공연이 있었지만 만원 관객이 아닌 적이 없었고 지방 공연도 연일 대성공이었다. 1938년 1월 설날에 부민관에서 전⋅후편이 공연되었는데, 상연된 첫날부터 대만원을 이루어 해방 전 한국 연극사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봉건적 도덕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묘사한 전형적 신파극으로 1930년대 후반의 상업주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 ‘고등 신파극’이라고 불리기도 한 ‘한 많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은 당대의 가장 중요한 관객인 화류계 여성의 처지를 대변하여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삶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과거를 문제 삼는 시어머니의 편견과 그녀 자신의 콤플렉스, 유학생과 경관이라는 중간 계층과 기생과 하류 계층 사이의 신분상의 장벽 등을 다루고 있어서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때 이서구의 작품인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라는 노랫말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녹음이 실패하는 바람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고, 1939년 최악의 영화로 선정되기도 하여 동양 극장은 4,000원이라는 큰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의 시민 대중은 그들의 지적 수준과 취미에 걸맞은 예술을 필요로 했고, 이것이 대규모로 산업화되고 대중화된 예술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조선의 영화 관람객은 꾸준히 증가하여, 1933년부터 해마다 1만여 명씩 증가하다가 1937년부터 2만 이상의 영화 관람객이 증가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영화 관람은 대중의 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신파극과 영화 등은 일제 시대 대중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주요 소재는 가정, 여성, 사랑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상업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들은 전근대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과의 첨예한 충돌 영역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각성, 자유로운 성애의 추구, 결혼과 이혼 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등은 전통 사회의 담론 체계가 해체되어 가는 주요 양상을 보여 주는 주제로서 전반적인 체제 붕괴의 신호탄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파극은 대중의 열렬한 호응과 지식인의 비난이라는 대조적인 반응을 동시에 이끌어 냈다. 이처럼 신파극이나 영화는 봉건적 가치관을 해체하고 당대 대중과 밀접하게 호흡하면서 근대적 가치관과 대중 문화를 급속히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930년대 대중극 연구: 동양극장 대표작을 중심으로」,『어문논집』31,김미도,,1992.
「일제시대 영화의 수용과 전개 과정」,『한국학보』20-2,김소희,,1994.
「한국 근대극의 대중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한국연극연구』창간호,박명진,,1998.
「신파극의 대중성 연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중심으로」,『한국극예술연구』5,신아영,,1995.
「화류비련담과 며느리 수난담의 조합: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서사구조」,『한국극예술연구』27,이영미,,2008.
『동양극장연구』,,최지연,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2007.
저서
『조선의 대중극단들』, 김남석, 푸른사상, 2010.
『한국 근대국의 재조명』, 김미도, 태학사, 1998.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한국근대극연구』, 이미원, 현대미학사, 1994.
『이토록 아찔한 경성』, 이충렬 외, 꿈결, 2012.
『오빠는 풍각쟁이야』, 장유정, 민음IN, 2006.
『경성리포트』, 최병택⋅예지숙, 시공사, 2009.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