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현대대중 문화의 발달

1960년대 서울 극장가와 상영 영화

88. 추억의 서울 극장가와 영화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에 극장은 손가락으로 꼽혔다. 서대문 로터리에 ‘서대문극장’이 있었고, 사거리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100m 가량 내려가면 일제시대에 세운 전통의 ‘동양극장’이 있었으며, 광화문 사거리 코너에 ‘국제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사 옆 계단을 올라가면 ‘아카데미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종로 방향으로 내려가면 인사동 입구 낙원빌딩 4층에 ‘낙원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종로3가 중심 사거리에 일제시대에 지어진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이 마주보고 있었으며, 여기서 청계촌 쪽으로 20m 내려오면 ‘세기극장(지금의 서울극장)’, 여기서 퇴계로 방향으로 가다보면 인현동 입구 사거리에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이 마주보고 있었고, 퇴계로3가에 ‘대한극장’과 ‘초동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을지로4가에 ‘국도극장’도 일제시대에 지은 것으로 그리스풍의 대리석 건물이 운치 있었다. 여기서 을지로5가에 이르면 국립의료원 근처에 ‘초동극장’, 을지로6가에 ‘계림극장’, 서대문 로터리에 ‘화양극장’, 그리고 미아리에 ‘대지극장’, 청량리에 ‘청량리극장’, 신설동에 ‘신설극장’과 ‘노벨극장’, 제기동에 ‘오스카극장’, 마포에 ‘봉래극장’, 신촌에 ‘신영극장’, 불광동에 ‘불광극장’이 있었다.

지금은 개봉관과 재개봉관의 구분이 없었지만, 그 시절에는 서울에 개봉관은 고장 10여 개에 불과했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극장은 ‘단성사’다. 1907년에 개관했으니 자그마치 그 역사가 100년이다. 처음에는 유랑 연극이나 연쇄극을 공연하는 전문 공연장이었다가 1918년에 영화 전용관으로 바꾼 후 나운규의 「아리랑」(1928년)이 처음 상영됐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이 상영돼 화제를 모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1980년대에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방화사상 최초로 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옛 건물을 허물고 2005년 초 멀티플렉스로 새롭게 단장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피카디리극장’은 1958년 ‘반도극장’으로 출범했다가 「콰이강의 다리」를 개봉하면서 대대적인 보수와 함께 지금의 ‘피카디리극장’으로 바꿨고, 1970~80년대에 흥행가의 선두주자로 이소룡의 「정무문」을 비롯해 「영웅본색」⋅「첩혈쌍웅」 등 홍콩 누아르 붐을 주도했다. 이 극장은 앞 광장에 유명 스타의 핸드 프린팅을 설치하여 미니 영화거리로 화제를 모았으며, 영화 「접속」에서 전도연과 한석규가 번번이 어긋나는 신의 배경 장면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역시 재건축에 들어가 2004년 말 다시 문을 열었다.

‘서울극장’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극장’과 같은 소속의 ‘세기상사’ 산하의 ‘세기극장’이란 이름의 재개봉관이었다가 1978년 합동영화사의 대표이던 곽정환 사장(영화배우 고은아의 남편)이 인수하여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봉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극장은 1980년대에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애마부인」 등 성인층 에로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다가 1990년대 초 멀티플렉스를 시도하며 심야상영을 하면서 데이트코스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선진 영화기법을 먼저 사용해 경쟁극장이 따라 하는 등 영화산업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1950년대 후반, 영화계는 70mm라는 초대형 화면이 등장해 화제를 뿌렸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70mm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은 ‘대한극장’이 유일했다. 개관 작품은 데보라 카와 케리 그랜트가 주연한 「잊지 못할 사랑」으로 이 영화는 나중에 맥 라이언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아네트 베닝의 「러브 어페어」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대한극장’은 「벤허」⋅「남태평양」⋅「닥터 지바고」⋅「사운드 오브 뮤직」⋅「아라비아의 로맨스」⋅「사상 최대의 작전」 등 70mm 대작을 주로 상영해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2004년 멀티플렉스로 재단장했다.

명동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중앙극장’은 일제시대인 1934년에 개관해 1945년 ‘중앙극장’으로 바꿔 재개봉관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6년 벽산그룹이 인수하며 개봉관으로 바꿔 첫 상영한 작품이 알란 라드 주연의 「쉐인」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젊은이들의 왕래와 많은 점을 감안해 주로 멜로물을 영화관에 올렸다. 문희의 「내 몫까지 살아주」 등 여성 관객들의 눈물을 짜냈으며, 아카데미 수상작인 「토요일 밤의 열기」⋅「디어 헌터」⋅「지옥의 묵시록」⋅「사관과 신사」⋅「록키」 등을 상영해 영화 팬들의 발길을 끌었다. 지금은 합동영화사가 인수한 후 ‘중앙 시네마’로 극장 이름이 바뀌었다.

‘스카라극장’은 일제시대인 1935년 ‘약초극장’으로 출발하여 해방 이후 ‘수도극장’으로 바꾸고, ‘단성사’, ‘국도극장’과 함께 1950년대까지 3대 개봉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한국 전쟁으로 극장이 일부 파손돼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재개관하면서 상영한 첫 작품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1962년 극장 이름을 지금의 ‘스카라극장’으로 바꾸고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을 무대에 올렸다가 기독교인들한테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시바의 여왕으로 나온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였다. 1970년대에 청년문화의 대표작이던 「병태와 영자」를 개봉하면서 하길종 감독이 관객의 반응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가 몰려드는 관객 인파를 보고 졸도했다는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명보극장’은 1958년 그레이스 켈리와 빙 크로스비 주연의 「상류사회」를 개관 프로로 올렸다. 1971년 당시 영화배우 신영균이 인수해 화제가 됐으며, 그는 이후 극장 부호가 됐다. 이 극장은 주로 방화(국산 영화)를 상영했는데, 「빙점81」⋅「접시꽃 당신」⋅「깊고 푸른 밤」 등이 흥행에 성공을 거뒀고, 1984년 최초로 멀티플렉스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국도극장’도 일제시대에 지은 극장으로 지금은 극장사업을 포기하고 쇼핑몰로 변신했으며, ‘을지극장’도 일련의 ‘007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극장이다.

신성원, 『가십으로 읽는 한국대중문화 101 장면』, 미디어집, 2005

88. 추억의 서울 극장가와 영화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에 극장은 손가락으로 꼽혔다. 서대문 로터리에 ‘서대문극장’이 있었고, 사거리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100m 가량 내려가면 일제시대에 세운 전통의 ‘동양극장’이 있었으며, 광화문 사거리 코너에 ‘국제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사 옆 계단을 올라가면 ‘아카데미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종로 방향으로 내려가면 인사동 입구 낙원빌딩 4층에 ‘낙원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종로3가 중심 사거리에 일제시대에 지어진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이 마주보고 있었으며, 여기서 청계촌 쪽으로 20m 내려오면 ‘세기극장(지금의 서울극장)’, 여기서 퇴계로 방향으로 가다보면 인현동 입구 사거리에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이 마주보고 있었고, 퇴계로3가에 ‘대한극장’과 ‘초동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을지로4가에 ‘국도극장’도 일제시대에 지은 것으로 그리스풍의 대리석 건물이 운치 있었다. 여기서 을지로5가에 이르면 국립의료원 근처에 ‘초동극장’, 을지로6가에 ‘계림극장’, 서대문 로터리에 ‘화양극장’, 그리고 미아리에 ‘대지극장’, 청량리에 ‘청량리극장’, 신설동에 ‘신설극장’과 ‘노벨극장’, 제기동에 ‘오스카극장’, 마포에 ‘봉래극장’, 신촌에 ‘신영극장’, 불광동에 ‘불광극장’이 있었다.

지금은 개봉관과 재개봉관의 구분이 없었지만, 그 시절에는 서울에 개봉관은 고장 10여 개에 불과했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극장은 ‘단성사’다. 1907년에 개관했으니 자그마치 그 역사가 100년이다. 처음에는 유랑 연극이나 연쇄극을 공연하는 전문 공연장이었다가 1918년에 영화 전용관으로 바꾼 후 나운규의 「아리랑」(1928년)이 처음 상영됐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이 상영돼 화제를 모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1980년대에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방화사상 최초로 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옛 건물을 허물고 2005년 초 멀티플렉스로 새롭게 단장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피카디리극장’은 1958년 ‘반도극장’으로 출범했다가 「콰이강의 다리」를 개봉하면서 대대적인 보수와 함께 지금의 ‘피카디리극장’으로 바꿨고, 1970~80년대에 흥행가의 선두주자로 이소룡의 「정무문」을 비롯해 「영웅본색」⋅「첩혈쌍웅」 등 홍콩 누아르 붐을 주도했다. 이 극장은 앞 광장에 유명 스타의 핸드 프린팅을 설치하여 미니 영화거리로 화제를 모았으며, 영화 「접속」에서 전도연과 한석규가 번번이 어긋나는 신의 배경 장면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역시 재건축에 들어가 2004년 말 다시 문을 열었다.

‘서울극장’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극장’과 같은 소속의 ‘세기상사’ 산하의 ‘세기극장’이란 이름의 재개봉관이었다가 1978년 합동영화사의 대표이던 곽정환 사장(영화배우 고은아의 남편)이 인수하여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봉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극장은 1980년대에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애마부인」 등 성인층 에로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다가 1990년대 초 멀티플렉스를 시도하며 심야상영을 하면서 데이트코스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선진 영화기법을 먼저 사용해 경쟁극장이 따라 하는 등 영화산업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1950년대 후반, 영화계는 70mm라는 초대형 화면이 등장해 화제를 뿌렸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70mm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은 ‘대한극장’이 유일했다. 개관 작품은 데보라 카와 케리 그랜트가 주연한 「잊지 못할 사랑」으로 이 영화는 나중에 맥 라이언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아네트 베닝의 「러브 어페어」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대한극장’은 「벤허」⋅「남태평양」⋅「닥터 지바고」⋅「사운드 오브 뮤직」⋅「아라비아의 로맨스」⋅「사상 최대의 작전」 등 70mm 대작을 주로 상영해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2004년 멀티플렉스로 재단장했다.

명동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중앙극장’은 일제시대인 1934년에 개관해 1945년 ‘중앙극장’으로 바꿔 재개봉관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6년 벽산그룹이 인수하며 개봉관으로 바꿔 첫 상영한 작품이 알란 라드 주연의 「쉐인」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젊은이들의 왕래와 많은 점을 감안해 주로 멜로물을 영화관에 올렸다. 문희의 「내 몫까지 살아주」 등 여성 관객들의 눈물을 짜냈으며, 아카데미 수상작인 「토요일 밤의 열기」⋅「디어 헌터」⋅「지옥의 묵시록」⋅「사관과 신사」⋅「록키」 등을 상영해 영화 팬들의 발길을 끌었다. 지금은 합동영화사가 인수한 후 ‘중앙 시네마’로 극장 이름이 바뀌었다.

‘스카라극장’은 일제시대인 1935년 ‘약초극장’으로 출발하여 해방 이후 ‘수도극장’으로 바꾸고, ‘단성사’, ‘국도극장’과 함께 1950년대까지 3대 개봉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한국전쟁으로 극장이 일부 파손돼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재개관하면서 상영한 첫 작품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1962년 극장 이름을 지금의 ‘스카라극장’으로 바꾸고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을 무대에 올렸다가 기독교인들한테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시바의 여왕으로 나온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였다. 1970년대에 청년문화의 대표작이던 「병태와 영자」를 개봉하면서 하길종 감독이 관객의 반응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가 몰려드는 관객 인파를 보고 졸도했다는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명보극장’은 1958년 그레이스 켈리와 빙 크로스비 주연의 「상류사회」를 개관 프로로 올렸다. 1971년 당시 영화배우 신영균이 인수해 화제가 됐으며, 그는 이후 극장 부호가 됐다. 이 극장은 주로 방화(국산 영화)를 상영했는데, 「빙점81」⋅「접시꽃 당신」⋅「깊고 푸른 밤」 등이 흥행에 성공을 거뒀고, 1984년 최초로 멀티플렉스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국도극장’도 일제시대에 지은 극장으로 지금은 극장사업을 포기하고 쇼핑몰로 변신했으며, ‘을지극장’도 일련의 ‘007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극장이다.

신성원, 『가십으로 읽는 한국대중문화 101 장면』, 미디어집, 2005

이 자료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극장과 영화의 발자취를 정리한 글이다.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성공하면서 한국 영화는 36mm 시대로 들어섰고, 이를 기반으로 1955년부터 제작 편수도 늘어나 영화 기술도 발전했다. 당시 이병일 감독, 조미령⋅김승호 주연의 「시집가는 날」이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희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한국 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 수상작이었다.

1960년대는 한국 영화 전성기였다. 1959년 108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1960년대에 꾸준히 증가하여 1970년 한국 영화사상 최고 제작 편수인 231편이 제작되었다. 또한 영화가 질적으로도 발전하여 다양한 장르 영화가 출현했다.

1962년 1월 미 군정청 법령 이후 최초로 「영화법」이 제정되었고, 그 뒤 1972년까지 4차례 개정되었다. 「영화법」의 원래 목적은 한국 영화의 보호와 육성이었지만 결국 제도적으로 영화 내용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장치가 되어 버렸다. 「영화법」은 당시 71개사에 이르던 영화사를 16개사로 통폐합시켰고, 신규 등록 여건을 엄격하게 만들었다. 등록된 제작사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대형화⋅비대화되었다. 결국 정부가 영화 제작에 깊숙이 관여하고 영화 검열을 강화함으로써 영화 내용과 질적 수준을 저하시키고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였다.

1961년에 발표된 주요 작품은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 강대진 감독의 「마부」,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 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 신상옥 감독의 문예 영화 「상록수」, 이만희 감독의 「불효자」 등이다. 이 가운데 「마부」는 제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했다. 1961년 7월에는 전쟁 직후 비참한 서울의 모습과 가난 및 실향, 전쟁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오발탄」이 당국의 재검열 지시로 상영이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5⋅16 쿠데타 이후 영화계에 가한 최초의 압력이었다.

1966년 4월과 8월에 「공연법」과 「영화법」이 개정되었고, 그 뒤 영화계에서 수많은 부도 사태가 일어났다. 정부는 정책을 통해 영화를 더욱 통제했고, 대종상에 반공 영화 부분을 만들었으며, 1967년부터 우수한 반공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를 주었다. 그 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을 도덕적으로 계몽한다는 명분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창작할 권리를 박탈하였고, 감독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말까지 영화에 대한 통제는 계속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가십으로 읽는 한국대중문화 101 장면』, 신성원, 미디어집, 2005.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1⋅2, 정종화, 열화당, 1997.
『한국영화 100년』, 호현찬, 문학사상사, 2000.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