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현대대중 문화의 발달

TV 시대의 도래

74. 만화가게 TV와 ‘김일과 이노끼의 레슬링 시합’

우리나라에 TV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5월 12일 첫 전파를 띄운 HLKZ-TV가 시초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필리핀, 태국 다음인 네 번째로 출범했다. 시설과 장비라고는 60평짜리 메인 스튜디오에 아나운서 부스 룸 2개, 비디컨 카메라 2대가 고작이었다.

처음에는 격일제로 하루 2시간씩 방송을 하다가 11월부터 30분이 늘어나 매일 2시간 30분간 방송했다. 그때는 모두 생방송이었으며 토요일 저녁 8시에 〈OB쇼〉라는 가요 프로그램에 가수와 영화배우들을 출연시켰다. 그런데 따로 광고 스팟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출연자들이 직접 광고 스팟을 했고 일부 출연자는 “술 광고를 하는 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예컨대 연예인이 소풍을 나온 장면을 꾸며 놓고 노래로 여흥을 즐기다가 맥주를 한 잔 들이키는 신으로 이때 카메라가 스타들이 마시는 맥주잔을 클로즈업시키며 ‘맥주’를 광고한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이 TV방송국이 1년도 안 왜 적자에 허덕이다가 한국일보사로 넘어가 대한방송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으나 곧 문을 닫았고, 1957년 8월에 AFKN-TV가 개국되고 KBS-TV는 한참 뒤인 1961년 12월 31일에, 그리고 민방으로는 1964년 12월 7일 TBC-TV가 각각 개국했다.

HLKZ-TV가 처음 개국하자 장안에 등장한 TV를 보려고 너도나도 구경을 갔는데 스튜디오의 한쪽 면을 유리로 해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루 고작 2시간의 방송을 보려고 연일 사람들이 몰려들자 나중에는 파고다공원, 서울역 광장, 명동에 24인치 대형 TV세트를 설치해 일반인들이 시청하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TV방송국이 한국일보사로 경영권이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재로 전소되고 만 것. 이런 가운데 AFKN, KBS, TBC가 속속 개국했지만 TV는 서민들한테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스포츠 중계방송이 있는 날이면 어른들은 다방으로, 동네 꼬마들은 만화가게로 달려갔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프로 권투와 프로 레슬링시합, 국가대항 축구경기였다.

빅 이벤트가 있는 날이면 다방이나 만화가게 문 앞에 ‘금일 저녁 7시 축구시합’ 또는 ‘박치기 왕 김일 대 이노끼의 세기적인 대결’, ‘알리 대 이노끼의 헤비급 타이틀전’이라는 문구가 나붙었다. 이날만큼은 다방에서 손님들한테 찻값을 선금으로 받았으며 만화가게는 꼬마손님들에게 입장료를 받았다.

그 가운데서 최고 인기는 한국 대표팀이 출전한 킹스컵 축구시합이었으며, 김기수와 벤베누티의 미들급 타이틀전,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유행어와 4전5기의 신화를 낳은 홍수환의 카라스키아와의 원정 시합,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헤비급 타이틀 매치 등은 당시에 TV가 아니면 감동을 느낄 수 없는 명장면들이었다.

그러다가 동남샤프TV와 금성TV 등 국산 TV가 등장하면서 안방극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즈음 인기있던 텔레비전 드라마는 거의가 외화로 〈보난자〉, 〈페이튼 플레이스〉, 〈컴팻〉, 〈배트맨과 로빈〉, 〈제5전선〉, 〈나폴레옹 솔로〉, 〈5공수사대〉, 〈기동순찰대〉, 〈스타스키와 허치〉 등이 있었으며, 국산 드라마로 TBC에서 방영한 〈아씨〉와 KBS의 〈여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주부들이 TV를 보느라고 저녁밥을 태우는가 하면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도둑을 맞기도 해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TV는 팝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 방송에서 〈톰 존스 쇼〉를 매주 방영했는가 하면, ‘산레모 가요제’를 녹화중계해 국내에 칸초네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1년 1월 말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열린 제20회 산레모 가요제는 MBC 창사 10주년 기획으로 중계됐다. 그해 우승곡은 니꼴라 디 바리와 나다가 부른 〈마음은 집시〉였고, 호세 휄리시아노가 안내견과 함께 나와 〈케세라〉를 불렀으며, 루치오 달라가 만돌린을 연주하며 부른 〈1943년 3월 4일생〉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TV의 위성중계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고, 재미를 붙인 MBC가 이듬해인 1972년 가요제를 다시 위성중계했다. 그러자 KBS도 뒤질세라 ‘유로비전 가요제’를 중계하는 등 이 땅에 가요제 중계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3년 1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와이 공연을 역시 MBC가 위성중계했는데, 이 실황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36개국에 중계되어 1억 명이 시청했고, 공연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1970년대에 이르자 TV는 차츰 라디오를 대신하는 미디어로 자리를 잡는다.

신성원, 『가십으로 읽는 한국대중문화 101 장면』, 미디어집, 2005

74. 만화가게 TV와 ‘김일과 이노끼의 레슬링 시합’

우리나라에 TV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5월 12일 첫 전파를 띄운 HLKZ-TV가 시초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필리핀, 태국 다음인 네 번째로 출범했다. 시설과 장비라고는 60평짜리 메인 스튜디오에 아나운서 부스 룸 2개, 비디컨 카메라 2대가 고작이었다.

처음에는 격일제로 하루 2시간씩 방송을 하다가 11월부터 30분이 늘어나 매일 2시간 30분간 방송했다. 그때는 모두 생방송이었으며 토요일 저녁 8시에 〈OB쇼〉라는 가요 프로그램에 가수와 영화배우들을 출연시켰다. 그런데 따로 광고 스팟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출연자들이 직접 광고 스팟을 했고 일부 출연자는 “술 광고를 하는 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예컨대 연예인이 소풍을 나온 장면을 꾸며 놓고 노래로 여흥을 즐기다가 맥주를 한 잔 들이키는 신으로 이때 카메라가 스타들이 마시는 맥주잔을 클로즈업시키며 ‘맥주’를 광고한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이 TV방송국이 1년도 안 왜 적자에 허덕이다가 한국일보사로 넘어가 대한방송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으나 곧 문을 닫았고, 1957년 8월에 AFKN-TV가 개국되고 KBS-TV는 한참 뒤인 1961년 12월 31일에, 그리고 민방으로는 1964년 12월 7일 TBC-TV가 각각 개국했다.

HLKZ-TV가 처음 개국하자 장안에 등장한 TV를 보려고 너도나도 구경을 갔는데 스튜디오의 한쪽 면을 유리로 해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루 고작 2시간의 방송을 보려고 연일 사람들이 몰려들자 나중에는 파고다공원, 서울역 광장, 명동에 24인치 대형 TV세트를 설치해 일반인들이 시청하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TV방송국이 한국일보사로 경영권이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재로 전소되고 만 것. 이런 가운데 AFKN, KBS, TBC가 속속 개국했지만 TV는 서민들한테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스포츠 중계방송이 있는 날이면 어른들은 다방으로, 동네 꼬마들은 만화가게로 달려갔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프로 권투와 프로 레슬링시합, 국가대항 축구경기였다.

빅 이벤트가 있는 날이면 다방이나 만화가게 문 앞에 ‘금일 저녁 7시 축구시합’ 또는 ‘박치기 왕 김일 대 이노끼의 세기적인 대결’, ‘알리 대 이노끼의 헤비급 타이틀전’이라는 문구가 나붙었다. 이날만큼은 다방에서 손님들한테 찻값을 선금으로 받았으며 만화가게는 꼬마손님들에게 입장료를 받았다.

그 가운데서 최고 인기는 한국 대표팀이 출전한 킹스컵 축구시합이었으며, 김기수와 벤베누티의 미들급 타이틀전,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유행어와 4전5기의 신화를 낳은 홍수환의 카라스키아와의 원정 시합,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헤비급 타이틀 매치 등은 당시에 TV가 아니면 감동을 느낄 수 없는 명장면들이었다.

그러다가 동남샤프TV와 금성TV 등 국산 TV가 등장하면서 안방극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즈음 인기있던 텔레비전 드라마는 거의가 외화로 〈보난자〉, 〈페이튼 플레이스〉, 〈컴팻〉, 〈배트맨과 로빈〉, 〈제5전선〉, 〈나폴레옹 솔로〉, 〈5공수사대〉, 〈기동순찰대〉, 〈스타스키와 허치〉 등이 있었으며, 국산 드라마로 TBC에서 방영한 〈아씨〉와 KBS의 〈여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주부들이 TV를 보느라고 저녁밥을 태우는가 하면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도둑을 맞기도 해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TV는 팝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 방송에서 〈톰 존스 쇼〉를 매주 방영했는가 하면, ‘산레모 가요제’를 녹화중계해 국내에 칸초네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1년 1월 말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열린 제20회 산레모 가요제는 MBC 창사 10주년 기획으로 중계됐다. 그해 우승곡은 니꼴라 디 바리와 나다가 부른 〈마음은 집시〉였고, 호세 휄리시아노가 안내견과 함께 나와 〈케세라〉를 불렀으며, 루치오 달라가 만돌린을 연주하며 부른 〈1943년 3월 4일생〉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TV의 위성중계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고, 재미를 붙인 MBC가 이듬해인 1972년 가요제를 다시 위성중계했다. 그러자 KBS도 뒤질세라 ‘유로비전 가요제’를 중계하는 등 이 땅에 가요제 중계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3년 1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와이 공연을 역시 MBC가 위성중계했는데, 이 실황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36개국에 중계되어 1억 명이 시청했고, 공연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1970년대에 이르자 TV는 차츰 라디오를 대신하는 미디어로 자리를 잡는다.

신성원, 『가십으로 읽는 한국대중문화 101 장면』, 미디어집, 2005

이 자료는 1950~60년대 TV 방송국의 등장과 그로 인해 변화된 문화상을 정리한 글이다. 1950년대에는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국, 민영방송인 기독교방송국⋅극동방송국⋅부산문화방송국 등 4개의 방송국이 있었다. 그 뒤 1961년 12월 한국문화방송국(MBC)이, 1963년 4월 동아방송국(DBS)이, 1964년 5월 동양방송국(TBC)이 각각 개국하여 다채널 시대가 열리고 상업방송이 시작되었다.

1961년 국영방송 KBS가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고, 1963년 1월 첫 상업광고를 내보냈다. 1966년 KBS는 상업광고로 재원을 확보하여 전국 방송망을 갖추었다. 1964년 동양방송 TBC-TV가, 1969년 문화방송 MBC-TV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여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를 맞았다. TV 수상기는 1969년 말 22만 대, 1973년 말 130만 대, 1975년 말 206만 대, 1979년 말 596만 대로 급증하였다.

1972년 12월 30일 유신 체제의 비상 국무회의는 「한국방송공사법」을 공포하여 정부 직할 체제인 KBS를 공영화하고 한국방송공사를 발족시켰다. 1973년 3월 3일 한국방송공사가 발족한 후 KBS는 크게 개편하여 민간방송 수준의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MBC는 창업 당시 지배 주주였던 김지태의 지분을 인수한 5⋅16장학회를 배경으로 TBC보다 유리하게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TBC는 설립 당시 허가받은 부산의 텔레비전국 외에 다른 지방국을 증설하지 못했다. 그러나 MBC는 1970년대 8개 주요 도시에 본사 자본과는 관련 없이 설립된 독립 법인을 ‘제휴사’라는 명목으로 계열화하였다. 이로써 MBC는 KBS보다 훨씬 빠르게 전국화를 완료했다.

텔레비전 방송은 TV 수상기가 널리 보급되고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대중문화 선도자로 등장하였다. 동시에 텔레비전 방송은 과도한 시청률 경쟁, 상업주의, 무분별한 외래문화 모방, 지나친 오락성 추구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정부는 격화되는 시청률 경쟁과 자유언론실천운동, 프로그램의 저질화를 막는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을 간섭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1971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히피족을 출연시키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1972년 4월 1일 KBS가 새마을 방송 전담 기구를 설치하여 새마을 홍보에 앞장섰고, TBC와 MBC도 새마을 방송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공보부는 ‘새마을 방송의 편의를 위해’ 각 방송사 업무 관련 국장으로 새마을방송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이 협의회는 방송 통제 기구가 되었다. 1975년 4월 14일 텔레비전 방송국 3곳이 모두 장발 연예인 출연을 거부하였으며, 같은 해 5월 23일 방송협회가 「방송정화실천요강」을 제정하였다.

1974년 12월 26일 발생한 〈동아일보〉 광고 해약 사태에 이어 1975년 1월 8일 동아방송도 광고 해약 사태에 휘말리는 등 언론 탄압이 계속되었다. 문화공보부는 1976년 4월 12일 각 방송국에 편성 지침을 전달하였다. 1977년 6월 24일 TV 코미디 폐지 권고 소동이 발생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강력한 통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79년 10⋅26사태 이후 1979년 12월 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어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텔레비전 컬러 방송이 가능한 상황이 전개되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편저
『한국 TV 40년의 발자취』, 정순일⋅장한성, 한울아카데미, 2000.
『우리방송 100년』, 최창봉⋅강현두, 현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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