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현대대중 문화의 발달

1970년대의 저항 문화

25. 1970년대의 저항 문화 - 민주화를 앞당긴 진보의 외침

금기의 장벽 너머에 있는 ‘사람의 세상’을 꿈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2005년 5월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 홀에서는 통기타 반주를 곁들인 독일어 버전의 「아침이슬」이 울려 퍼졌다. 한국인의 애창곡이 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독일의 시인 겸 가수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었다.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는 “2년 전 독일에서 김민기를 만나 이 노래를 알게 됐다”며 “한국이 통일되는 날, 「아침이슬」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옛 동독 시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볼프 비어만은 당시에 즐겨 불렀던 「격려」라는 노래를 불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케냐 출신의 망명 작가 응구기와 시옹오(Ngũgĩ wa Thiong′o)가 “한국의 시인 김지하의 「오적」에서 영감을 얻어 평론집 『작가와 정치』,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를 썼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1973년 김지하의 영역 시집 『민중의 외침(Cry of the People)』을 접한 후 이야기⋅노래⋅속담 등 구전 전통을 활용해 아프리카 민중의 사회적 저항, 정치적 단합을 촉구하는 민중적 다성성(多聲性)의 글쓰기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에는 ‘누가 누가 더 악마적인가?’를 경쟁하는 ‘도적들’이 등장한다.

「오적」과 「아침이슬」은 이제 한국인만의 문화가 아니다. ‘금지’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한국 저항 문화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의 신장에 기여한 인류의 문화적 보배가 되었다.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저항이라는 진실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도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 가치 확산과 행정의 민주화라는 가시적 성취를 얻어냈다. 전사회적으로 탈권위⋅민주화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회 재조직화(reorganization)’가 진행되었다. 예술에서 좌⋅우파를 따지는 일은 옛말이 되었고, 보수와 진보의 논란 역시 더 이상 정치적 색깔 시비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문화는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특유의 자율성을 표현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더 이상 역사의 가역반응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고해졌다. 한마디로 말해 이제는 ‘문화 사회(cultural society)’의 비전이 중요해졌다.

이런 문화적 과정이란 주체의 자기 정립을 요구했다. 1970~80년대 저항문화(counter-culture)’와 청년 문화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한국의 경우 ‘청년 문화=저항 문화’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소위 ‘엇섞임’이라는 미묘한 균열이 존재한다. 김지하 시인은 두 문화의 ‘섞임’을 위해 노력한 문화인이 영화감독 하길종과 김민기였다고 회고한다. “김민기가 가야금과 거문고를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잘 안돼. 그래서 그냥 기타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 비록 형식과 지향점은 사뭇 다를지 모르지만,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두 하위 문화는 ‘반(反) 파쇼’라는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찾기 위해 연대했다.

장발⋅통기타⋅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는 1960년대 후반 서구 청년 문화의 자장권(磁場圈)에서 비롯됐다. 청년 문화는 포크송과 록 뮤직 등 특히 대중음악 부문에서 자신의 문화를 그려냈다. 트윈 폴리오⋅한대수⋅김민기⋅양희은⋅양병집의 포크송과 신중현의 록 뮤직은 청년 문화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의 등장은 청년 문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지하는 “죽음과 고문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침이슬」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저항이었고 대안이었다”라고 평했다. 청순한 음색과 중성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여성 보컬 양희은은 포크의 이념을 표상했다. 그는 명동 청개구리집에서 데뷔한 뒤 빅살롱 코스모스 성전, 젊은이의 성지 오비스캐빈 등 명동의 다운타운을 누비며 한국 모던 포크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의 한대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노래 「하루아침」(1974년)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삐딱한 야유가 묻어난다. “배는 조금 고프고 눈은 본 것 없어서 / 명동에 들어가 아! 국수나 한 그릇 마시고 / 빠문 앞에 기대어 치마 구경 하다가 / 하품 네 번 하고서 집으로 왔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관제(官製) 히트곡 「새마을 노래」와 비교해보라. 그러나 이 노래는 제1집 『멀고먼 집』(1974년)에는 수록되지 못한다. ‘정치적’ 검열을 염려한 탓이다. 결국 1989년판에야 수록될 수 있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창남은 “당시의 포크송은 감각적인 차별성을 드러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유신 체제는 팝 음악의 발랄한 활동조차 국민 총화에 역행하는 불온성으로 치부했다. 1975년에는 가요 심의와 규제 조치, 그리고 대마초 가수 일제 검거를 통해 청년 문화의 저항성을 거세했다. 왜색, 월북, 반체제, 풍자, 미풍양속 저해라는 이유로 입을 막은 것이다.

저항 문화의 사정은 더욱 심했다. 신체적인 위해는 물론 목숨조차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시를 쓰되 좀쓰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풍자 저항시 「오적」이 발표되면서 촉발된 ‘오적 재판’은 시 예술 혹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감옥에 가둔 ‘한국적’ 반달리즘의 사례였다. 김지하의 장광설이 마냥 과장이었는가. 김지하는 인터뷰에서 “중정 요원들이 서울 동빙고동을 현장 조사해, 당시 모 권력자의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사실을 알아냈다”면서, 되레 “김지하가 애국자야!”라는 칭찬(?)의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김지하는 또 “당시 『사상계』에 실린 삽화에 ‘지하’라는 사인이 적혀 있지만, 실은 판화가 오윤이 그렸다”고 덧붙였다.

1970~80년대는 ‘금지’의 시대였다. 시인 김지하는 1970년대 저항 문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수난 속의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적 사건’ 이후 시인은 검열, 판매금지, 연행, 투옥이라는 고난의 여정을 건너야 했다. 오늘의 작가들이 차라리 이념 검열이 존재했던 1970~80년대가 행복했노라고 자조적으로 푸념하는 것에 비한다면 거대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의 청년 문화와 저항 문화는 이후 대중문화의 주류적 경향에 저항하는 두 흐름을 형성했다. 이 흐름은 훗날 ‘1980년 광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맞아 운동권 문화(대학) 또는 민중 문화(문학)로 심화 확산되는 전이 과정을 밟게 된다. 민중문화열은 하나의 현상처럼 번졌다. 수천 곡이 넘는 민중가요가 창작되었고, 문화운동론에 대한 갑론을박 논쟁 또한 가열되었다.

재미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불가능한 ‘자유’를 꿈꾸는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사람이 사는 삶에 문화가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은 쉽게 부정될 수 없으리라. 1980년대 문화는 그러한 믿음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세상”(문익환)을 향한 해방의 서사를 구현하고자 했다.

『아! 대한민국』, 랜덤하우스코리아, 중앙일보사, 2005

25. 1970년대의 저항 문화 - 민주화를 앞당긴 진보의 외침

금기의 장벽 너머에 있는 ‘사람의 세상’을 꿈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2005년 5월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 홀에서는 통기타 반주를 곁들인 독일어 버전의 「아침이슬」이 울려 퍼졌다. 한국인의 애창곡이 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독일의 시인 겸 가수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었다.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는 “2년 전 독일에서 김민기를 만나 이 노래를 알게 됐다”며 “한국이 통일되는 날, 「아침이슬」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옛 동독 시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볼프 비어만은 당시에 즐겨 불렀던 「격려」라는 노래를 불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케냐 출신의 망명 작가 응구기와 시옹오(Ngũgĩ wa Thiong′o)가 “한국의 시인 김지하의 「오적」에서 영감을 얻어 평론집 『작가와 정치』,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를 썼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1973년 김지하의 영역 시집 『민중의 외침(Cry of the People)』을 접한 후 이야기⋅노래⋅속담 등 구전 전통을 활용해 아프리카 민중의 사회적 저항, 정치적 단합을 촉구하는 민중적 다성성(多聲性)의 글쓰기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에는 ‘누가 누가 더 악마적인가?’를 경쟁하는 ‘도적들’이 등장한다.

「오적」과 「아침이슬」은 이제 한국인만의 문화가 아니다. ‘금지’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한국 저항 문화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의 신장에 기여한 인류의 문화적 보배가 되었다.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저항이라는 진실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도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 가치 확산과 행정의 민주화라는 가시적 성취를 얻어냈다. 전사회적으로 탈권위⋅민주화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회 재조직화(reorganization)’가 진행되었다. 예술에서 좌⋅우파를 따지는 일은 옛말이 되었고, 보수와 진보의 논란 역시 더 이상 정치적 색깔 시비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문화는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특유의 자율성을 표현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더 이상 역사의 가역반응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고해졌다. 한마디로 말해 이제는 ‘문화 사회(cultural society)’의 비전이 중요해졌다.

이런 문화적 과정이란 주체의 자기 정립을 요구했다. 1970~80년대 저항문화(counter-culture)’와 청년 문화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한국의 경우 ‘청년 문화=저항 문화’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소위 ‘엇섞임’이라는 미묘한 균열이 존재한다. 김지하 시인은 두 문화의 ‘섞임’을 위해 노력한 문화인이 영화감독 하길종과 김민기였다고 회고한다. “김민기가 가야금과 거문고를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잘 안돼. 그래서 그냥 기타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 비록 형식과 지향점은 사뭇 다를지 모르지만,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두 하위 문화는 ‘반(反) 파쇼’라는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찾기 위해 연대했다.

장발⋅통기타⋅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는 1960년대 후반 서구 청년 문화의 자장권(磁場圈)에서 비롯됐다. 청년 문화는 포크송과 록 뮤직 등 특히 대중음악 부문에서 자신의 문화를 그려냈다. 트윈 폴리오⋅한대수⋅김민기⋅양희은⋅양병집의 포크송과 신중현의 록 뮤직은 청년 문화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의 등장은 청년 문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지하는 “죽음과 고문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침이슬」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저항이었고 대안이었다”라고 평했다. 청순한 음색과 중성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여성 보컬 양희은은 포크의 이념을 표상했다. 그는 명동 청개구리집에서 데뷔한 뒤 빅살롱 코스모스 성전, 젊은이의 성지 오비스캐빈 등 명동의 다운타운을 누비며 한국 모던 포크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의 한대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노래 「하루아침」(1974년)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삐딱한 야유가 묻어난다. “배는 조금 고프고 눈은 본 것 없어서 / 명동에 들어가 아! 국수나 한 그릇 마시고 / 빠문 앞에 기대어 치마 구경 하다가 / 하품 네 번 하고서 집으로 왔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관제(官製) 히트곡 「새마을 노래」와 비교해보라. 그러나 이 노래는 제1집 『멀고먼 집』(1974년)에는 수록되지 못한다. ‘정치적’ 검열을 염려한 탓이다. 결국 1989년판에야 수록될 수 있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창남은 “당시의 포크송은 감각적인 차별성을 드러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유신 체제는 팝 음악의 발랄한 활동조차 국민 총화에 역행하는 불온성으로 치부했다. 1975년에는 가요 심의와 규제 조치, 그리고 대마초 가수 일제 검거를 통해 청년 문화의 저항성을 거세했다. 왜색, 월북, 반체제, 풍자, 미풍양속 저해라는 이유로 입을 막은 것이다.

저항 문화의 사정은 더욱 심했다. 신체적인 위해는 물론 목숨조차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詩를 쓰되 좀쓰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풍자 저항시 「오적」이 발표되면서 촉발된 ‘오적 재판’은 시 예술 혹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감옥에 가둔 ‘한국적’ 반달리즘의 사례였다. 김지하의 장광설이 마냥 과장이었는가. 김지하는 인터뷰에서 “중정 요원들이 서울 동빙고동을 현장 조사해, 당시 모 권력자의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사실을 알아냈다”면서, 되레 “김지하가 애국자야!”라는 칭찬(?)의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김지하는 또 “당시 『사상계』에 실린 삽화에 ‘지하’라는 사인이 적혀 있지만, 실은 판화가 오윤이 그렸다”고 덧붙였다.

1970~80년대는 ‘금지’의 시대였다. 시인 김지하는 1970년대 저항 문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수난 속의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적 사건’ 이후 시인은 검열, 판매금지, 연행, 투옥이라는 고난의 여정을 건너야 했다. 오늘의 작가들이 차라리 이념 검열이 존재했던 1970~80년대가 행복했노라고 자조적으로 푸념하는 것에 비한다면 거대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의 청년 문화와 저항 문화는 이후 대중문화의 주류적 경향에 저항하는 두 흐름을 형성했다. 이 흐름은 훗날 ‘1980년 광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맞아 운동권 문화(대학) 또는 민중 문화(문학)로 심화 확산되는 전이 과정을 밟게 된다. 민중문화열은 하나의 현상처럼 번졌다. 수천 곡이 넘는 민중가요가 창작되었고, 문화운동론에 대한 갑론을박 논쟁 또한 가열되었다.

재미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불가능한 ‘자유’를 꿈꾸는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사람이 사는 삶에 문화가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은 쉽게 부정될 수 없으리라. 1980년대 문화는 그러한 믿음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세상”(문익환)을 향한 해방의 서사를 구현하고자 했다.

『아! 대한민국』, 랜덤하우스코리아, 중앙일보사, 2005

이 사료는 1970년대 유신 정권에서 불거진 음악⋅문학 등 저항 문화를 정리한 글이다. 197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장기 집권의 길로 나아가던 정치적⋅사회적 격변기였다. 1969년 3선 개헌을 통한 박정희의 재집권과 전태일의 분신, 광주 대단지 사건, 「오적」 필화 사건, 유신 체제 등장, 위수령과 민청 학련, 긴급조치 등은 이 시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저항 문화가 발전하여 저항시⋅민중시⋅사회시 등이 등장하였다. 1970년대 문학에서는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평등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김지하는 「오적」으로 ‘시를 통한 사회 참여’의 실례를 보여 주었고, 전통 판소리 형식을 빌린 담시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여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신경림의 시 「농무(農舞)」(1971)는 민속놀이 ‘농무’를 빌려 당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온 농촌공동체 파괴를 비판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는 산업화와 더불어 인간의 소외와 불평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소외’와 ‘어둠’을 노래하는 시도 많이 나타났다.

1970년대에 또 다른 특징적인 현상으로 청년 문화가 등장하였다. 청년들은 시대 상황에 대해 고민하였고 저항 의식을 표출하였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청바지와 통기타였다. 1960년대 후반 서구와 미국을 휩쓴 베트남 참전 반대 투쟁, 인종차별 반대 투쟁, 여성 해방운동,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바지와 통기타는 한국으로 건너와 유신 체제라는 암울한 시대에 반항하는 상징이 되었다. 김민기⋅한대수⋅양병집⋅양희은⋅서유석 등의 노래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들의 청년 문화를 반사회적 방종으로 내몰았다. 박정희 정권은 대중음악 검열을 강화하여 금지곡을 양산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 뒤 문화공보부는 대중가요를 모두 재심사하여 222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방송윤리위원회’가 「고래사냥」⋅「아침이슬」 등을 추가로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1975년 말 대마초 파동과 함께 청년 문화의 주역들이 대부분 방송 무대에서 사라졌고, 197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통기타 음악과 청년 문화 시대는 막을 내렸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7.
『가십으로 읽는 한국대중문화 101장면』, 신성원, 미디어집, 2005.
『한국대중가요사』, 이영미, 시공사, 1998.
편저
『대중음악과 노래운동, 그리고 청년문화』, 김창남 편, 한울, 2004.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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