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현대대중 문화의 발달

프로 야구의 개막

85. 프로스포츠 시대의 개막 - 1인당 GNP 1,500달러 시대의 기적

권력이 낳고 애향심이 키운 프로스포츠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2년 프로스포츠의 시대가 열렸다. 국민의 불만을 마비시키려는 3S(Sports, Screen, Sex) 정책이라는 사회의 비난 속에 프로야구가 개막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반대했지만 일부에서는 열광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고교야구를 발판으로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 등 지역 연고제로 시작된 프로야구는 개막 전부터 열기를 뿜었고, 한국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500달러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계속된 결과 ‘꿈의 1천 달러’ 벽을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프로스포츠가 제대로 활성화되려면 1인당 GNP가 2만 달러는 돼야 한다는 분석이 있었다. 23년이 지난 2005년에도 1인당 GNP는 1만 4천 달러 정도이니 당시에 프로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역설적이지만 프로야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 땅에 정착할 수도 없었고, 성공할 수도 없었다. 전 대통령은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TV에서 스포츠를 적극 중계방송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프로야구는 초창기부터 어렵지 않게 TV 중계방송을 따낼 수 있었다. 당연히 흥행에 기폭제가 됐다.

전 대통령은 각 부처에 프로야구를 정책적으로 밀어주라고 지시했다. 문교부와 문공부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도록 했고, 내무부는 운동장 사용료를 5년간 면제해줬으며, 재무부는 프로야구 구단이 흑자가 될 때까지 면세 조치를 해줬다.

정책적인 지원만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스타는 지역에서도 스타가 돼야 한다”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대부분 서울에서 살고 있던 선수들은 각자 소속된 팀의 연고지로 이사를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프로야구의 지역 연고제가 초기에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에는 고교 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고향과 모교를 응원하는 사람들로 고교 야구 대회는 항상 붐볐고, 이미 ‘오빠 부대’도 형성돼 있었다. 프로야구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고교 야구의 인기를 고스란히 옮겨왔다는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의 대도시 본거지 제도와 일본 프로야구의 대기업 중심제의 장점만을 본뜬 한국 프로야구는 철저한 프랜차이즈(본거지제)를 도입하여 구단주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본거지 출신으로 구성했다. 고교야구 스타들이 다시 고향을 대표하는 프로 선수가 된 것이 지역 감정과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경상도 정권하에서 강한 불만이 있던 호남사람들은 호남을 대표하는 해태 타이거즈 팀에 절대적인 응원을 보내며 울분을 풀었고, 해태는 우승으로 보답했다.

프로야구의 성공은 이 땅에 화려한 프로스포츠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씨름도 ‘민속씨름’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프로화를 선언했다. 이봉걸⋅이준희⋅홍현욱으로 대표되던 씨름판에 이만기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하면서 민속 씨름 역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축구는 프로야구 출범 다음 해인 1983년에 프로화가 됐다. 1986년까지 프로팀과 실업팀이 혼재한 형태로 운영되던 프로축구는 1987년에 와서야 비로서 본격적인 프로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의 12개의 프로팀과 프로선수로 구성된 상무팀이 K-리그에서 실력을 겨루고 있다.

남자 농구는 1997년, 여자 농구는 1999년, 남자 배구는 2005년에 각각 프로스포츠에 동참했다. 여자 배구는 2006년에 프로화한다고 선언했다. 소위 인기 종목들이 모두 프로가 된 것이다.

1인당 GNP가 2만 달러가 되지 않는 한국에 프로스포츠가 너무 많다는 비판도 있다. 프로의 거대화로 아마추어 종목은 상대적으로 더욱 죽어버리는 부작용도 생겼다.

이제는 프로가 아니면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시대가 돼버렸다. 그러나 1년에 수십억 원씩 모기업의 지원을 받는 변칙 운용,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서비스 등은 한국의 프로스포츠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다.

『아! 대한민국』, 랜덤하우스코리아, 중앙일보사, 2005

85. 프로스포츠 시대의 개막 - 1인당 GNP 1,500달러 시대의 기적

권력이 낳고 애향심이 키운 프로스포츠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2년 프로스포츠의 시대가 열렸다. 국민의 불만을 마비시키려는 3S(Sports, Screen, Sex) 정책이라는 사회의 비난 속에 프로야구가 개막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반대했지만 일부에서는 열광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고교야구를 발판으로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 등 지역 연고제로 시작된 프로야구는 개막 전부터 열기를 뿜었고, 한국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500달러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계속된 결과 ‘꿈의 1천 달러’ 벽을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프로스포츠가 제대로 활성화되려면 1인당 GNP가 2만 달러는 돼야 한다는 분석이 있었다. 23년이 지난 2005년에도 1인당 GNP는 1만 4천 달러 정도이니 당시에 프로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역설적이지만 프로야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 땅에 정착할 수도 없었고, 성공할 수도 없었다. 전 대통령은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TV에서 스포츠를 적극 중계방송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프로야구는 초창기부터 어렵지 않게 TV 중계방송을 따낼 수 있었다. 당연히 흥행에 기폭제가 됐다.

전 대통령은 각 부처에 프로야구를 정책적으로 밀어주라고 지시했다. 문교부와 문공부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도록 했고, 내무부는 운동장 사용료를 5년간 면제해줬으며, 재무부는 프로야구 구단이 흑자가 될 때까지 면세 조치를 해줬다.

정책적인 지원만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스타는 지역에서도 스타가 돼야 한다”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대부분 서울에서 살고 있던 선수들은 각자 소속된 팀의 연고지로 이사를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프로야구의 지역 연고제가 초기에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에는 고교 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고향과 모교를 응원하는 사람들로 고교 야구 대회는 항상 붐볐고, 이미 ‘오빠 부대’도 형성돼 있었다. 프로야구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고교 야구의 인기를 고스란히 옮겨왔다는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의 대도시 본거지 제도와 일본 프로야구의 대기업 중심제의 장점만을 본뜬 한국 프로야구는 철저한 프랜차이즈(본거지제)를 도입하여 구단주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본거지 출신으로 구성했다. 고교야구 스타들이 다시 고향을 대표하는 프로 선수가 된 것이 지역 감정과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경상도 정권하에서 강한 불만이 있던 호남사람들은 호남을 대표하는 해태 타이거즈 팀에 절대적인 응원을 보내며 울분을 풀었고, 해태는 우승으로 보답했다.

프로야구의 성공은 이 땅에 화려한 프로스포츠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씨름도 ‘민속씨름’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프로화를 선언했다. 이봉걸⋅이준희⋅홍현욱으로 대표되던 씨름판에 이만기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하면서 민속 씨름 역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축구는 프로야구 출범 다음 해인 1983년에 프로화가 됐다. 1986년까지 프로팀과 실업팀이 혼재한 형태로 운영되던 프로축구는 1987년에 와서야 비로서 본격적인 프로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의 12개의 프로팀과 프로선수로 구성된 상무팀이 K-리그에서 실력을 겨루고 있다.

남자 농구는 1997년, 여자 농구는 1999년, 남자 배구는 2005년에 각각 프로스포츠에 동참했다. 여자 배구는 2006년에 프로화한다고 선언했다. 소위 인기 종목들이 모두 프로가 된 것이다.

1인당 GNP가 2만 달러가 되지 않는 한국에 프로스포츠가 너무 많다는 비판도 있다. 프로의 거대화로 아마추어 종목은 상대적으로 더욱 죽어버리는 부작용도 생겼다.

이제는 프로가 아니면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시대가 돼버렸다. 그러나 1년에 수십억 원씩 모기업의 지원을 받는 변칙 운용,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서비스 등은 한국의 프로스포츠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다.

『아! 대한민국』, 랜덤하우스코리아, 중앙일보사, 2005

이 사료는 1980년대 야구를 시작으로 민속씨름⋅축구⋅농구 등 프로스포츠 시대가 개막되는 과정을 정리한 글이다. 제5공화국은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1988년 제24회 하계 올림픽 서울 개최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5일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연맹(AGF) 집행위원회에서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개최권도 따냈다.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직후인 1981년 10월 5일, 프로야구 창립 기획안이 제출되었다. 1981년 5월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우리 국민들은 여가 선용 기회가 별로 없고 또 한국인은 스포츠를 좋아하니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 뒤 MBC 해설 위원으로 활동한 이호헌과 KBO(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용일이 18쪽 분량의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만들었다. 축구계가 프로화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보고한 것과 달리 야구계는 ‘정부 보조 없이 프로야구를 출범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기업들이 야구단 운영을 맡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1981년 11월 25일 제1차 프로야구 관계자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서울의 MBC 청룡,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 대전의 OB 베어즈,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보름 후인 12월 11일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1982년 1월 20일 청와대에서 구단주들과 만난 전두환 대통령은 각 부서에 연락해 KBO가 요구하는 것은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각 부처는 프로야구 지원책을 마련했다. 그 결과 운동장 사용료 5년간 면제, 모기업이 야구단을 지원할 때 손비 처리, 프로야구 선수 연봉의 세율 대폭 인하 등이 이루어졌다. 프로야구는 이렇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정부 주도 아래 탄생하였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 경기가 열렸고, 이후 프로야구는 1980년대에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출범으로 한국에서도 프로스포츠 시대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에는 프로농구도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의 체육 정책은 외형만 보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한국은 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 달리 국민 대중의 문화 수준은 실속이 없다는 비판도 많이 제기되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지나친 스포츠 발흥, 스포츠에서 배금주의 만연 등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비판이 일기도 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프로야구의 현장」,『신동아』1982년 8월호,김일동,동아일보사,1982.
저서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2,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3.
『스포츠와 정치』, 고광헌, 푸른나무,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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